서른 무렵의 3년쯤을 중국 베이징에서 보냈다. 학생이자 동시에 이곳저곳의 한국어 강사였던 나는 그중 한곳인 인민대학교 유학생 기숙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방학이 되면 가끔 마작 모임을 열었다.
딱 지금 이맘때쯤이었다. 많은 유학생들이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중국 여기저기로 여행을 떠나 기숙사 안은 썰렁했고 인터넷도 안 되던 때라 달리 무슨 여흥이 없었다. 날까지 추운데 어디 나가 놀 곳도 없는 가난한 유학생들은 내 방에서 열리는 마작 파티를 몹시 기대했다. 우리는 중국의 대중문화를 섭렵한다는 미명하게 열심히 마작 패를 돌리고 부수고 쌓았다.
그런데 어느 날, 절대로 절대로 이런 모임엔 끼이지 않을 것 같던 일본인 N이 내 방문을 두드렸다.
내 방은 공동 세면장 입구에 있어서 같은 층에 사는 모든 학생들의 생활 패턴을 자연히 알 수 있었다. 법학 전공 대학원생이던 N은 기숙사 8층에서 가장 외로워보였지만 유일하게 별명을 가진 유명 인사였다.
‘똑딱이’.
수업이 있건 없건 방학이건 학기 중이건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방 불을 끄던 그녀. 샤워 시간도 세탁 시간도, 심지어 볼일 보러 나오는 시간까지도 딱 정해져 기숙사의 시계와도 같았던 그녀가 밤새워 마작을 하겠다고?
몹시 의외였지만 나로서는 대환영이었다. 마작은 딱 네 명의 멤버가 필요한 게임이고 이미 골수파 네 명이 정해져 가는 중이었지만 체력 부족으로 밤샘이 힘에 겨웠던 나로서는 그녀의 합류 덕분에 객들이 ‘훌러’를 외치는 동안 옆에서 쪽잠도 잘 수 있었고, 게임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야참도 만들어 내올 수 있었다. 마작도 좋았지만 나만 인민대학생이 아니라는 외로움을 떨치는 게 더 큰 목적이었던지라 그렇게 손님 접대와 시중을 드는 것이 더 즐거웠다. 모두 즐겁게 밤새 마작을 두고 동이 터오는 아침, 시장에 나가 사먹던 훈뚠(중국의 아침 식사용 만둣국)과 꽈배기 맛을 어찌 잊으랴...
이런 저런 사정으로 그 시절 친구들 연락처를 하나도 알지 못한 채 서울로 돌아온 나는 조금씩 모든 기억을 잊어가고 있었는데 페이스북이라는 시대의 요물 덕분에 그녀와 다시 연락이 닿았다. 황급히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20년 가까이 안 쓰고 살았던 중국어로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마작을 즐기냐는 나의 질문에 그녀가 준 대답은...정말 의외였다.
마작이 좋아서가 아니라 ‘손끝’ 때문이었단다.
손끝?
마작패를 뒤섞을 때 맞부딪히던 J의 손가락 끝...!
마작 멤버 중 하나였던 J는 박사과정이 끝나가던, 아주 유쾌한 미남자였다. 그 짧은 중국어로 어떻게 그렇게 모두를 웃길 수 있는지, 나도 참 좋아했던 선배인데... 그에게는 곧 결혼할 예정인 여자 친구가 있었고, 그녀가 한차례 베이징까지 다녀갔기 때문에 그녀의 존재와 그 빛나는 미모를 대부분 알고 있었다. 주변 소식에 어두웠던 N은 그런 그를 좋아했던 것이다. 처음엔 먼발치에서만 보던 그가 좋아서 마작판 문을 두드렸고 대화를 통해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이란 걸 알고 포기하려고 했지만, 게임과 게임 도중 패를 섞을 때 그와 손끝이 스치는 순간, 그 짜릿함이 너무 좋아서 멈출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순간, 아주 오래된 프랑스 영화 <남과 여>가 떠올랐다. 너무 오래 전에 보아서 자세한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 국민학생이던 내가 그 지루한 흑백 영화를 끝까지 보았던 것도 손끝의 감동 때문이었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은 N과 J처럼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에 처해있었다. 그러나 둘은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교양 있고 양심적인(?) 사람들. 그럼에도 둘은 숨겨 온 마음을 들켜버리고 마는데 그것이 바로 손끝 때문이었다. 각자의 아이들을 데리고 자그마한 배에 올랐을 때였다. 그 둘의 손끝이 스치는 순간이 나온다. 처음엔 그저 우연히 스쳤지만 결국엔 두 남녀가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손을 맞잡는다.(내가 만든 망상일 수도 있다. 둘의 손은 그냥 스치기만 했을 수도) 그 때 나는 내 가슴 속에서 열매 하나가 툭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처음 경험했었다.
툭!
아마도 그런 느낌이었겠지. 짜릿하고 감미로운... 그러나 조금은 놀랍고 두려운...
말로 써놓고 보니 영 부족하다.
어쨌거나 사랑은 터치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손길이 더 많은 걸 말한다. 어쩌면 모든 것을...
J가 느꼈건 말았건 N에게 그 순간은 황홀한 찰나였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기억이다. 물론 사랑의 상대성 이론을 믿는 나는, J도 그 순간, N에게 흔들렸으리라고 믿는다.
가슴 속의 열매가 툭 떨어지는 순간......
이제는 영화 속 주인공에 빙의 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내 것이 아닌, 내 것이어서는 안 되는 그 느낌... 그 느낌을 간절히 찾고 있을, 당당히 누릴 권리가 있는 솔로들이 부럽다고 말하면 부도덕한 사람이 되려나?
그 정도로는 성에 안 찬다는 사람들에게는 간이 콩알만 한 한심한 사람이 되고?
각설!
사랑은 손끝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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