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이경은 기자】 “피임약은 준비했지만 강요는 아니었다”

이는 최근 논란이 된 ‘국민은행 피임약’ 사건에 국민은행 관계자가 내놓은 답변이다. ‘피임약은 준비했지만 강제적인 권유는 아니었다’라는 말에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라는 말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모 연예인의 말이 떠오른 건 왜 일까.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국민은행은 지난 주 충남 천안에서 진행된 신입사원 연수에서 이틀간 100km을 걷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문제는 KB국민은행이 100km 행군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여직원들에게 피임약을 나눠준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 문제와 관련해 크게 두 가지 비판이 일고 있다. 하나는 100km 행군이라는 업무 능력과 무관한 극기 훈련을 연수 프로그램에 포함시켰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여직원들에게 피임약을 나눠주며 무리하게 프로그램에 참여토록 했다는 것이다.

먼저 100km 행군의 필요성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과연 ‘행군’과 ‘은행원의 업무 능력’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국민은행은 100km 행군 프로그램을 수년 째 신입직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직력을 강화하고 인내력을 기르기 위한 차원이라는 게 국민은행 측의 입장이나 업무와 무관한 군대식 악습일 뿐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시대가 변했음에도 극기 훈련을 통해 인내력을 기른다는 구시대적인 발상 아래 시대착오적인 군대식 조직 문화를 포장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국민은행에 더 큰 질타가 쏟아진 건 여직원들에게 피임약을 제공한 문제였다.

국민은행 측은 “피임약을 준비했지만 강요는 아니었다. 상비약처럼 마련해 놓고 원하는 사람의 요청에 따라 피임약을 지급했다”라는 해명을 내놨다. 이는 피임약의 강제성 여부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해 내놓은 답변인 듯하다. 기자에겐 이 말이 피임약을 준비했다는 것 자체는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말로 해석됐다. 그러나 강제성 여부는 2차적인 문제일 뿐 행군을 위한 피임약을 준비했다는 그 자체가 논란이 되기에 충분한 대목이다.

여자들에게 생리는 그야말로 ‘고통’이다. 월경이 시작되기 전 두통을 비롯한 불안, 초조, 불면증 등 심리적 불안을 겪는 현상인 ‘생리전 증후군’을 가임기 여성의 약 75%가 한 번씩은 경험하고 이 가운데 5~10%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신체적인 변화도 찾아오는데 배, 머리가 아프고 유방통도 느껴지며 몸이 퉁퉁 붓게 된다. 오죽하면 법적으로 생리휴가가 있겠는가.

기자도 10년 넘게 생리를 하면서 시험 기간 때, 여행을 가야할 때 등 불편한 적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피임약을 복용해 본 적은 없다. 혹시라도 있을 부작용이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사전피임약의 경우 최소 5일 정도 복용해야 하는 것을 감안할 때 여직원들이 피임약 복용으로 인해 자칫 행군 기간 중에 두통, 정맥혈전 등 부작용을 겪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커지는 반발에 국민은행 측은 “건강상 행군이 어려운 사람은 빠질 수 있도록 조치도 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조직문화 특성상 반강제성을 갖기 마련이고 특히 신입사원이라는 처지를 고려할 때 프로그램 중 하나인 행군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이를 고려해보면 여직원들에게 “피임약을 준비해놨다”라는 말은 “피임약을 먹어 생리를 미루고 행군에 참여하라”라는 말로 들렸으리라 추측된다.

100km 행군이 국민은행에서 어느 정도 중요한 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과연 몸의 신체적인 증상까지 바꿔가며 참여할 정도의 중요성을 갖고 있는 지, 약을 먹어가며 행군을 하면 단기간에 조직력을 기를 수 있는 것인지, 입장을 바꿔 자신의 딸, 여자친구, 혹은 아내가 ‘피임약을 준비해놨으니 필요하면 쓰라’는 말을 들었다면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는지 묻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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