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인터뷰] 세월호 진상규명 촉구 광화문 진실마중대 서명지기 조미선

▲ 조미선씨가 지난 10월 25일 서울 광화문광장 진실마중대에서 시민에게 서명을 받고 있다 ⓒ투데이신문

참사 후 유가족 인터뷰에 봉사 결심해
팽목서 광화문까지 3년간 꾸준히 봉사

가족들도 “당연히 해야 할 일” 격려
봉사자 역할, 유가족과 함께 하는 것

세월호 참사, 우리 사회 전환점
‘2기 특조위’ 분명 진척 있을 것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투쟁에는 유가족과 미수습자 가족뿐 아니라 수많은 시민들이 참여해왔다. 앞선 인터뷰에서 ‘창현엄마’ 최순화씨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곁을 지켜주는 분들이 가장 힘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광화문과 안산,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과 활동가들이 있다. 유가족들, 미수습자 가족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힘을 주는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3년간의 싸움을 견뎌왔을까.

<투데이신문>은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후 팽목항에서부터 지금까지 세월호 자원봉사를 이어오고 있는 서명지기 조미선씨를 만나 지난 3년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투데이신문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세 딸의 엄마고, 세월호광장 진실마중대에서 서명지기로 자원봉사 하고 있는 대학 영어강사다.

Q. 세월호 관련 봉사를 시작한 계기는.

세월호 이전에는 한 번도 사회적인 활동을 해본 적이 없다. 세월호참사가 발생하고 온 국민들이 힘들어했는데, 나도 똑같았다. 내 아이들이 세월호에서 희생된 학생들과 비슷한 또래다. 그래서 시쳇말로 ‘멘붕’ 상태로 지내던 중 언론에서 희생자 어머니 중 한 분이 “내가 이 나라에 너무 관심을 갖지 않아서 우리 아이가 죽었다. 이 나라가 안전한 줄 알고 성수대교, 서해훼리호 등의 사건을 남의 일로만 알고 살았다. 그러다보니 내 자식까지 죽게 됐다. 여러분들도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다. 봉사든 시위든 뭐든 해 달라”고 요청한 인터뷰를 보게 됐다. 그분 말씀대로 이제는 뭐든 해야겠다는 생각에 참사 31일째인 2014년 5월 16일 1박 2일 일정으로 남편과 함께 진도로 내려갔다.

이후 팽목항에 몇 번 더 내려갔다가 그해 7월 14일, 유가족들이 350만명의 특별법 제정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하니 모여 달라고 요청해 첫 피케팅 시위를 했다. 그리고 바로 광화문으로 갔는데 몇몇 유가족들이 단식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세월호 특별법 입법 촉구 서명을 받고 있었는데, 그 날이 아마 광화문 서명대가 생긴 첫날이었을 것이다. 그날부터 봉사활동을 하게 됐다.

Q. 다른 봉사할 곳이 많았을 텐데 진실마중대에서 봉사를 하고 있는 이유는.

처음엔 서명대라 불렀다. 2주기 때 부스가 설치되면서 진실마중대라는 이름을 붙이게 됐다. 서명을 받던 첫날은 지금처럼 부스가 있는 게 아니라 테이블 하나만 놓고 서명을 받았다. 당시 서명대 주위에 외국인들이 많았다. 외국인들이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 해서 내가 설명을 해주게 됐다. 그때 ‘내가 영어강사고 회화가 가능하다보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겠다’ 싶어 그날부터 서명지기가 됐다.

Q. 최근에도 서명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많은지.

여전히 많기는 하다. 서명지기나 봉사자들이 멈추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을 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명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많기 때문이다. 요즘 학생들을 우리는 ‘세월호 세대’라고 부른다. 이 세월호 세대가 서명지기와 봉사자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더라. 또 끝까지 잊지 않으려고 가방에 노란리본을 달고 봉사자들을 격려해주는 것을 보면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이 자리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 2017년 4월 16일 경기 안산시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416청소년 추모회화전 전시작 ⓒ투데이신문

투쟁하며 마주한 ‘대한민국 민낯’

Q. 유가족·미수습자 가족들과 진상규명 싸움을 함께 하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대단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이래서 부모구나’하는 것을 느낀다. 유가족들이 포기하지 않았기에 봉사자들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가족들이 처음에는 자기 자식의 죽음, 억울함만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렇게 투쟁을 이어가면서 이 나라의 민낯을 보게 된 것 같다. 그러면서 ‘내 자식만의 문제가 아니구나’라는 것을 느꼈고 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까지 알게 됐다. 그래서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다.

Q. ‘유민아빠’ 김영오씨가 단식할 때도 광장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안다. 당시 보수단체에서 ‘폭식투쟁’을 하며 조롱하기도 했는데.

‘보수’라는 분들과 많이 싸웠다. 그러면서 성질이 많이 나빠진 것 같다(웃음). 그런 것들이 유가족과 봉사자들에게 또 하나의 트라우마를 남겼다. 언젠가는 조계사 근처에서 ‘세월호에는 사람이 있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들고 집회를 하고 있었는데, 모 보수단체의 대표가 이를 보고 웃으면서 “쟤네 좀 봐. 세월호에 사람이 아직도 있대. 사람이 물속에 얼마나 있어야 죽는지 모르나봐”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을 수없이 겪으면서 인간에 대한 신뢰를 많이 잃었다.

Q. 서명대 맞은편에서 매일같이 보수집회가 있었다. 마주보면서 심정이 어땠는지.

보수단체에서 ‘세월호 특별법 반대’, ‘북한으로 가라’는 등의 현수막과 십자가를 들고 찬송가, 애국가를 번갈아 불러가면서 우리를 괴롭혔다. 굳이 서명대까지 찾아와 괴롭히기도 한다. 서명할 것처럼 찾아와서 “이게 뭐예요?”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박근혜가 침몰시켰대요?“라고 서명지기들을 떠본다. 하도 당하다 보니 지금은 ”아, 저도 몰랐는데 박근혜가 그랬대요?“라고 받아친다. 그 전에는 화도 내고 싸우기도 했다. 

이 사람들이 참 치사한 게, 진실마중대 근처에 남성이 없고 경찰이 없으면 찾아와서 시비를 건다. 그 사람들은 아직도 ‘보상금 받지 않았냐’라고 말한다. 그러면 ”보상금 안 받은 거 초등학생들도 아는데 아직도 모르셨어요?“라고 되받아쳤다. 3년 전이나 지금이나 언론에서 밝혀지고 있는 세월호에 대한 정보들을 믿지 않고 여전히 그때 당시의 루머들을 아직도 믿고 있다. 유가족들은 여전히 2014년 4월 16일을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도 여전히 3년 전 4월 16일을 살고 있는 것 같다.

▲ 조미선씨가 지난 10월 25일 서울 광화문광장 진실마중대에서 학생들에게 노란리본을 나눠주고 있다 ⓒ투데이신문

Q.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서명자들이 있다면.

광화문에는 전 세계 사람들이 많이 온다. 그들과 얘기를 하면서 많은 얘기들을 듣고 느낀다. 그들이 하는 말이, ‘나라마다 다 이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 1년에 한 번씩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다. 그 사람이 얼마 전 한국에 왔는데, 초창기에 나눠준 세월호 리본을 갖고 있었다. 처음 나눠준 리본은 지금 같은 스폰지(EVA)재질이 아니라 천으로 된 것이었다. 그래서 “이건 옛날 건데, 어디서 났어?”라고 물으니 그 사람이 “2014년 11월 한국 왔을 때 받았어”라며 세월호를 기억하면서 지금까지 자기 나라에서도 리본을 달고 다녔다고 하더라. 정말 감동스러웠다. 또 어떤 프랑스 사람이 노란리본 배지를 달고 있길래 “이거 어디서 받았어?”라고 물었더니 “기억 안 나지? 1년 전에 여기서 너한테 받았어”라고 했다. 1년 동안 배지를 달고 다니며 세월호를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또 참사가 발생한 지 5개월쯤 지났을 때 한 아르헨티나 남성이 광화문 광장을 쭉 둘러보더니, 대통령이 사는 곳과 가깝고 저항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아르헨티나의 5월 광장(May square)과 비슷하다고 했다. 

수십 년 전 아르헨티나에서는 3만여명의 사람들이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강제로 납치·실종됐다고 한다. 군부 비판세력이나 그들의 자녀를 납치해 바다 한가운데 떨어뜨려 죽이기도 하고 갓난아이를 납치해 입양시키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독재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대통령은 죽으면서도 납치한 아이들을 어디로 보냈는지 말하지 않았단다. 자녀를 잃은 엄마들은 아기 기저귀를 상징하는 하얀 숄을 두르고 자식을 찾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고 한다. 젊었던 엄마들이 할머니가 되고 죽기도해서 시위를 하는 엄마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지만 결코 멈추지 않았다. 결국 정부의 말만 믿고 이들을 미친 사람 취급하며 조롱하고 침묵했던 국민들이 하나둘씩 하얀 숄을 두른 엄마들과 함께하기 시작했다.

외국에서도 이를 인권탄압으로 규정하고 움직여준 덕에 어쩔 수 없이 국가가 움직였고, DNA 검사를 통해 100명 이상의 자녀를 찾아 엄마 품에 돌려보낼 수 있었다고 했다. 이렇게 되기까지 무려 35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투쟁은 군부독재가 막을 내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아르헨티나 남성은 세월호 엄마들의 슬픔에 깊이 공감한다며 이들의 요구는 당연하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5개월이 지났다고 하니 그 남성이 미소를 지으면서 “세월호 엄마들은 진실을 알기 위해 35년까지는 걸리지 않기 바라”라고 말했다. 힘이 들다가도 외국인들이 이렇게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공감해 줄 때 ‘옳은 일을 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다시 힘이 난다.

▲ 조미선씨가 피켓시위를 하는 모습 <사진제공 = 조미선씨>

Q. 광장에서 보낸 세월이 3년을 넘었다.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족들의 동의가 봉사활동을 지속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가족들과는 모든 일을 공유한다. 처음 팽목항에 갈 때도 가족과 함께 갔다. 남편과 아이들도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엔 봉사로 생각하고 시작했지만 지금은 삶이 됐다.

Q.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드는지.

요즘은 노란리본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다. 노란리본을 달고 다니는 분들을 보면 ‘동지의식’이 많이 든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니까 수업 시간에 노란리본과 팔찌를 나눠 주기도 하는데, 요즘은 학생들이 먼저 달라고 한다.

어느 목사님은 지난겨울 촛불집회에 나왔다가 너무 ‘강성’인 진보 성향의 시민들이 하는 말을 듣고 ‘박사모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 그 후로 노란리본을 떼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어떤 사람의 가방에 달려있는 노란리본을 보고 ‘내가 세월호를 잊고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광화문에 노란리본을 가지러 왔다고 말하더라. 백 마디 말보다 노란리본이 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것 같다.

Q. 봉사활동을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광장에서 서명을 받다보면 “이렇게 고생은 하시는데 진상규명은 안될 것 같아요. 이 나라에서 진상규명이 제대로 된 적이 없잖아요”라며 걱정을 하는 분들도 있다. 그때 내가 한 말이 있다. “진상규명이 되면 가장 좋겠지만 되지 않더라도 국민들이 끝까지 함께 했다는 것으로 유가족들이 위안 받고 나머지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하고 있어요. 진상규명은 나라가 해야 할 몫이고, 우리의 몫은 유가족들과 함께 있어주는 것이에요”라고 말했다. 

거리에서 투쟁을 이어가는 유가족들은 트라우마 치료를 받지 못했다. 지금은 미친 듯이 진상규명을 위해 뛰고 있지만 만약 진상규명이 안 된 채 세월호 농성장 문을 닫아버리면 유가족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봉사를 지속하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우리 사회가 이들의 자녀도 지키지 못했는데, 이들마저도 잃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 지금까지 추지 않고 있다.

▲ ⓒ투데이신문

“노란리본, 평생 달고 다닐 거예요”

Q. 정권이 바뀐 후 진실마중대에서 만나는 시민들이 많이 달라졌다고 느끼는지.

많이 바뀌었지만 안타까운 것도 있다. 정권이 바뀌고 나서 문재인 대통령이 세월호 유가족들을 청와대로 초대했다. 그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진상규명을 철저히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 후 시민들이 마음을 놓아버린 것 같다. 2기 특조위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미 해결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특히 문 대통령을 굉장히 사랑하는 몇몇 분들은 “대통령이 그만큼 해줬는데 대통령을 믿고 그만 철거하라”고 하기도 한다.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철거하라는 말이 나와 속상하기도 하다. 그 분들께는 “대통령만 바뀌었지 진상규명을 방해한 실무자들은 그대로 있기 때문에 진상규명이 될 때까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Q. 2기 특조위가 출범하면 진상규명에 진척이 있을 것으로 보는지.

그럴 것이다. 1기 특조위는 수사권이 없어서 아무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2기 특조위는 수사권을 갖게 됐고 상시특검을 할 수 있다. 1기 특조위 때 많은 방해를 겪었기 때문에 많은 부분을 보완했다. 분명히 진척이 있을 것이다.

Q. 진상규명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선 유가족들이 해야 할 일, 시민들이 해야 할 일,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지난 3년간 유가족과 시민들은 할 바를 다 한 것 같다. 정치권의 역할만 남았다. 그동안 보수정당은 세월호 특조위를 방해하는 등 진상규명을 번번이 가로막았다. 또 진보정당들도 ‘더 강경하게 밀어붙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민들이 이렇게까지 했으면 정치인들이 정신 차리고 해야 하는데 여전히 안 하고 있으니 ‘우리가 또 뭘 해야 하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서글프다.

Q.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 달라진 것이 있다면.

유가족들의 삶이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뉘듯 나도, 우리 사회도 그런 것 같다.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후 사회의 잘못된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이 나라를 더 사랑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다음 세대를 많이 생각하게 됐고, 젊은 사람들을 보면서 희망을 많이 갖게 됐다.

Q. 노란리본을 계속해서 달 것인지.

진상규명이 된 후에도 평생 달고 다닐 것이다. 노란리본은 우리 시대의 십자가와 같다. 이미 우리 마음속에 박혀있다.

Q. 진상규명을 위해 정치권과 시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세월호 진상규명에 대한 특별법이 국민 650만여명의 서명으로 2014년 11월 7일 국회에 통과됐다. 그 이후로도 서명전은 계속 이어졌고 목표했던 1000만명 서명이 이미 달성된 걸로 알고 있다. 국민 5명 중 1명은 서명을 한 것이다. 세월호 진상규명 촉구 서명은 이곳 광화문뿐 아니라 전국에서, 그리고 해외에서도 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이렇게 오래 이렇게 많은 서명을 받았던 적이 있을까.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국민이 마음을 모았는데도 진상규명이 안 되고 있는 이 현실이 안타깝고 화가 난다. 도대체 지난 3년여 동안 우리는 뭘 한 건가 싶다. 답답하고 속상하고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세월호 유가족과 국민들은 할 바를 다 했다. 넘치도록 했다. 자신의 몫을 하지 않은 건 정치인들뿐이다. 끝까지 눈 부릅뜨고 지켜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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