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재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공개사과 요구. 대학 학부생이던 시절 학내 대자보에서 그와 같은 표현을 마주할 때면, 다행히 내가 그 대상이었던 적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늘 불편했다. 왜 그렇게 불편했을까. 이제 와서 돌아보면 세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그런 방식으로 순리에 맞게 문제가 해결된 적을 본 적이 없었다는 것, 그래서 앞으로 펼쳐지게 될 지난하고 지루한 과정에 미리부터 지쳐버리곤 했다. 다른 하나는 어찌 보면 사회적 관계에 치명타를 안길 수도 있는 처벌의 잣대가 매우 모호하고 자의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 정작 공개사과를 빈번하게 요구하는 집단일수록 그 자신이 그와 비슷한 과오를 저질렀을 때는 절대 공개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이 마지막 부분이 가장 불편했다.

그와 비슷한 이중적인 모습들은 이것 말고도 우리 주변에 아주 많다. 거대한 폭력의 희생자들에게 제3자 때로는 가해자들이 화해를 주문하고, 피해자들의 처신에도 잘못된 점이 많다며 가해의 기억과 상계를 요구하는 사례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개인적 경험 상, 타인에게 용서를 강요하는 이들일수록 정작 그 자신은 작은 상처도 잊지 못하고, 정당한 비판에도 울컥하며 기어이 복수를 다짐하는 경우가 많았다.

교육 현장에 대해 나름의 분석과 대안 그리고 교사들을 향해 쓴 소리를 멈추지 않고 쏟아내던 모 교수의 글에 언젠가부터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그가 제자들을 대하는 모습을 알고 나서부터였다. 일선의 교사들에게는 성직자와 같은 희생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제자들 사이에서 괴담이 떠돌아다니는 스승이었다.

내가 이러한 사례들을 언급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 군상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폭로하고 상기하기 위함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이중적이고 어느 정도는 자기중심적이기에 대부분의 사안에 있어 한두 번은 부끄러운 기억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너와 나에 대한 이중 잣대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당연시된다면 그것은 문제이지 않을까.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해결방안은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이다. 내가 비슷한 상황에서 용서하고픈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온전히 제자들만을 위해 자신의 삶과 가정을 헌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현장의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나아가면 슬픔에 빠진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자식은 가슴에 묻는 거라며 이런저런 비난을 늘어놓던 이들, 갑자기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경황이 없는 지역민들에게 왜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피해를 입어야 하느냐며 공리를 거론하는 이들, 과연 이들 중에 대를 위한 희생의 제비뽑기에 당첨돼 소수자의 위치에 섰을 때 기꺼이 받아들일 이가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솔직하게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고 살아가는가. 얼마나 화해와 용서를 하며 살아가는가. 교사나 의사, 변호사 등 다른 직군의 구성원들에게 성직자 수준의 윤리를 요구하는 이들 중에서 그처럼 살아가는 이들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러면서도 마땅히 높은 수준의 윤리의식을 담보해야 할 진짜 성직자들에게는 관대한 곳이 바로 우리 사회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죄 없는 자만이 돌을 들어 그들을 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성찰의 개념을 반대 지점에서 되짚어보기 위함이다. 타인에게 엄격한 만큼 내 자신에게도 엄격해지기 위한 성찰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너그러운 만큼 타인의 삶에도 너그러운 잣대를 들이대기 위한 성찰이 가끔씩은 필요하다.

또한 언제고 내가 저 소수자의, 피해자의 때로는 피고인의 위치에 자리할 수 있다는 점을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를 둘러싼 온갖 사회문제들의 해결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평범한 사람들로 이뤄진 사회가 진보할 수 있다.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성인이 되기를 요구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지속 자체가 불가능하다.

사실 이렇게 거창한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오래도록 알고 지내왔던 지인이 얼마 전 인간관계의 불화로 인해 감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오랜 기간 동안 누적돼왔던 분노와 불안을 마구잡이로 터뜨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선뜻 조언을 내밀 수가 없었다. 잊고 사는 것이, 그저 묻고 지내는 것이 정답처럼 보였지만, 만약 내가 그 지인의 입장이라면 그러한 조언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내가 그와 같은 모습을 보였을 때 그는 어떤 태도를 보였는가, 돌아봤다. 참고 인내했던 것 같다. 덕분에 우리들의 관계가 깨지지 않고 여기까지 왔던 것 같다.

이번에는 나의 차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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