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구·김금자 부부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백운산장, 90년 넘게 북한산서 희로애락
산악인들에게 고향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

기부채납 약정 종료로 국가시설 귀속 위기 놓여
산장지기 “죽는 날까지 산장 지킬 수만 있다면”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파란 하늘 아래 굽이굽이 펼쳐진 바위가 절경을 이루는 북한산. 가을을 맞아 붉은 단풍잎과 노란 은행잎이 어우러진 알록달록 색동옷으로 갈아입은 북한산에는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북한산의 정기를 온몸으로 흠씬 느끼며 정상을 향해 걷다보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잠시 숨 돌릴 장소가 떠오르기 마련. 이때 산 좀 타봤다는 등산객이라면 누구나 ‘백운산장’을 추천한다.

▲ 북한산 등산로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때로는 등산객들의 쉼터로, 때로는 맛있는 요깃거리로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매점으로 수십년째 북한산을 지키고 있는 백운산장은 ‘산악인들의 고향’이라고 불릴 정도란다. 그런데 최근 많은 산악인들의 추억을 담고 있는 백운산장이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존폐위기에 놓여 언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백운산장을 지난달 26일 <투데이신문>이 찾았다.

▲ 1960년 리버티 뉴스에 등장한 백운산장 설립 과정(캡처) <자료 제공 = 한국산악회 이영준 이사>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에서 해발 약 650m 아래에 위치한 백운산장은 1924년 처음 이곳에 터를 잡고 1933년 정식으로 건축 허가를 받으며 신축된 국내 최초의 민간 산장이다. 6․25 전쟁 과정에서 한 차례 폭격을 맞고 허물어진 백운산장은 1959년 서울산악회 소속 산악인들에 의해 재건축됐다. 이후 1992년 등산객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했고 또 다시 산악인들이 힘을 모아 1996년 2층으로 증축된 모습으로 지금까지 약 90년째 운영되고 있다.

▲ 산장지기 이영구씨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산장 입구에 들어서니 삼삼오오 모여 앉아 쉬고있는 등산객들 사이에서 산장지기 이영구(86)씨가 주변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이씨와 그의 아내 김금자(77)씨의 하루는 산장 주변을 청소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기자와 짧은 인사를 마친 이씨는 바람에 여기저기 나부끼는 낙엽들을 쓸어 모아 산장 한 편에 밀어놓고 오랜만에 찾아와 반갑게 인사하는 손님들 틈에 앉아 그동안의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산장 안에 들어서니 김씨가 손님들이 주문한 컵라면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백운산장에서는 초콜릿, 사탕 등 각종 군것질 거리를 비롯해 컵라면, 쌀국수, 물 등을 팔고 있다. 산장에서 판매되는 모든 물건은 산 아래에서부터 가지고 올라와야 한다. 이씨 부부가 직접 구매해 나르기도 했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 힘에 부치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지게꾼을 불러 주문하고 있다. 

▲ 산장지기 김금자씨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김씨는 점심은 이곳에서 먹겠다는 기자에게 “내가 직접 끓은 국수를 먹고 가야 하는데”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김씨는 손수 잔치국수를 만들어 팔았다. 국수를 먹기 위해 산장을 찾는 등산객들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돌연 취식을 금지한다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이하 공단) 측의 통보에 따라 더는 국수를 팔 수 없게 됐다. 때문에 지금은 뜨거운 물만 부으면 완성되는 컵라면 종류만 팔고 있다고 했다.

기자와 김씨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한 남성이 생수를 구매하기 위해 산장으로 들어섰다. 그는 갑자기 기자를 향해 “산 속에서 물 한 병에 1500원이면 매우 저렴한 거죠. 여기서 물을 어떻게 구해요”라며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또 한 여성은 쫄깃한 인절미 한 봉지를 건네며 “잘 먹고 가요. 할머니, 또 올게요”라고 발걸음을 돌리기도 했다. 등산객들과 이씨 부부 사이의 남모를 끈끈한 정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산장지기 김금자씨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김씨는 이씨와 결혼한 이후 줄곧 산장에서만 생활했다고 한다. 때문에 친정나들이는커녕 시내 외출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남들보다 편안한 삶을 살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씨 부부는 오남매를 건강하게 낳아 남부럽지 않게 기르며 백년해로를 하고 있음에 만족해했다. “연세도 있으신데 내려가서 편하게 사는 게 좋으실 텐데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김씨는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 거 같아”라며 손사래를 쳤다. 백운산장은 이씨 부부에게 그들의 인생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백운산장을 빼면 부부의 삶은 설명되지 않는다고 한다. 

▲ 20년 유예 기부채납 국가귀속 약정서 <자료 제공 = 한국산악회 이영준 이사>

한평생 몸 바쳐 지켜왔건만 이씨 부부는 조만간 백운산장을 떠나야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있다. 1993년 화재 이후 증축하는 과정에서 공단 측이 20년 유예 기부채납 조건으로 건축허가를 해준 것이다. 그리고 그 약정이 올해 5월 만료됐고 공단 측은 유예기간이 종료됐기 때문에 산장을 국가시설로 귀속하겠다며 이씨 부부에게 떠날 것을 통보했다.

▲ 백운산장 국가귀속 반대 서명대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 등산객들이 남긴 쪽지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이는 이씨 부부 뿐만 아니라 백운산장에 애정을 갖고 있는 많은 산악인들에게도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이에 한국산악회와 대한산악연맹, 서울특별시산악연맹 등은 함께 ‘백운산장 보존대책위원회’(이하 보존위)를 구성해 백운산장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해달라는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백운산장을 지키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덕분에 백운산장의 기부채납 과정은 잠시 중단되는듯 했으나 공단 측에서 명도소송을 제기해 오는 12월 재판을 앞두고 있다.

한국산악회 이영준 이사는 “산악인들의 반대로 백운산장 존치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설령 백운산장이 국가에 귀속될지라도 그 운영자를 이씨 부부로 지정하는 등의 차선책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 백운산장 전경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이씨 부부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그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힘 닿는 만큼 산장을 지키는 것뿐이다.

부쩍 공기가 차가워진 요즘, 이씨 부부는 고장난 보일러를 고치지 않고 전기장판과 난로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곳에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부디 이씨 부부가 올겨울도 따뜻한 백운산장에서 맞이할 수 있길 바라본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