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17세기 화가 렘브란트의 명화 '야경'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다. 오래전 유럽으로 배낭여행 갔을 때다. 늘 렘브란트를 최고의 화가로 생각했다. 야경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였고 언젠가는 실제로 보고 싶던 그림이었다.

미술관의 긴 공간을 따라 양 옆에 많은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저 멀리 막다른 벽에 그 그림이 있는 것 같았다. 한 번에 받을 큰 감동이 조금씩 새 나갈까봐 가까워지는 동안 일부러 눈길을 피했다. 드디어 그림 앞에 섰고, 정면으로 쳐다봤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속이 울렁였다. 정수리로 산소가 일시에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생각이란 걸 하고는 있는지 도통 감각이 없었다. 보는 순간 보는 행위가 사라졌다. 정신의 무중력 상태 같은 특이한 경험이었다.

내가 겪은 건 '스탕달 신드롬' 아니었나 싶다. 프랑스 작가 스탕달이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고 나오다 다리가 풀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던 경험담을 책에 쓰면서 알려진 증후군이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다가 심장이 빨라지고 의식혼란과 어지러움 등을 겪는 증세다.

아름다움과 추함을 비롯해 감상 중에 겪는 감정의 변화는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내면과 합쳐져 방향성을 갖는다. 그림을 대하며 체험하는 심리적 변화는 오로지 관람자의 것이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다만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사람의 감정은 각자의 처지나 욕망 등에 영향 받는다. 외부의 자극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은 한 개인의 내면의 반영일 수 있다. 그것은 예술감상처럼 개인적인 영역뿐 아니라 특정한 사회현상이나 사건처럼 공공의 영역에 반응 할 때도 마찬가지다. 

가령 한편의 시를 읽을 때 느끼는 감정이나, 시를 쓰는 시인이 호텔 홍보를 조건으로 숙박을 원한다는 소식을 접할 때의 감정을 해석 하는 것은 각자의 내면과 연결 되어 있다. 정서의 울림을 그리는 시 세계는 현실에서의 다양한 감정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독자의 욕망을 충족시킨다. 호텔은 현실에선 가질 수 없는 풍요로운 공간에 대한 욕망을 충족 시킨다. 그런 점에서 시를 욕망하는 것이나 호텔방을 욕망 하는 것은 둘 다 현실과 비교되는 기대의 다른 이름이다. 

시의 독자든 특급호텔 고객이든 자신이 기준 삼은 기대와 희망을 위해 돈과 시간을 지불한다. 일전에 최영미 시인이 호텔방에 장기숙박을 제안했을 때도 그것은 돈으로 쉽게 환산됐다. 대중은 최 시인의 작중 세계가 비싼 호텔 숙박과 등가교환이 가능한지를 비교했다. 그 것은 곧 우리사회에서의 시인의 위상과 연결 되었고 결국 시와 시인은 호텔처럼 등급이 매겨졌다. 이는 각자가 가진 욕망의 기준과 크기를 타인에게 반영한 자격부여다. 

이런 현상은 빈번하다. 240번 버스 운전기사에 대한 논란이 그러했다. 처음엔 어린 딸이 내린 채 출발했으니 버스를 세워 달라는 어머니의 청을 버스기사가 거부했다고 알려졌다. CCTV로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초기여론은 그 버스기사를 악인으로 그려댔다. 여기에는 자본과 인간다움 사이에서 버스기사가 선량한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있는가 하는 물음이 있다. 이는 도덕률에 관한 대중의 욕망을 반영한다. 240번 버스기사에 대한 성급한 비난은 각자가 사회에서 느끼는 결핍의 크기를 속도로 반영한 것이다. 

근래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가수 고 김광석의 아내 서해순씨에 대한 논란도 비슷하다. 김광석의 죽음과 딸의 죽음을 둘러싸고 서씨의 석연치 않은 과거 행적이 도마 위에 오른 뒤, 대중여론은 서씨를 천하의 악인으로 그리고 있다. 서씨가 한 몇차례 인터뷰는 일각의 의심이 사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런데 서씨를 향한 의심이 실제로 맞는지 여부를 떠나, 서씨에 대한 여론의 묘사가 대중이 꺼리는  - 혹은 바라는 - 악인의 모습에 정확히 부합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냉혈한 사이코패스가 선량한 한 사람을 해쳤을 것으로 단정한다. 여기에도 어김없이 저작인접권료라는 돈 이야기가 등장했다. 사람들은 의심의 밑바닥에서 서씨가 누군가의 선량한 삶이 남긴 풍요를 가질 자격이 있는가를 묻는다. 

서씨에 대한 논란은 우리사회가 가진 기괴함의 대척점에 선의를 상징하는 우상을 설치하여, 그 우상을 보호하는 행위를 통해 현실의 악에 저항하는 각자의 피로감을 위로하는 측면이 있다. 선량한 세상을 원하는 욕망은 타인의 자격을 파헤치게 만들고, 자신의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누군가를 절대악으로 상정하여 비난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행복의 결핍이 과도한 욕망을 자극하여 스스로를 더욱 피로하게 만드는 순환이다. 

우리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회에서 어떤 현상이 벌어지든, 현실을 불행하게 받아들이는 대중의 무의식은 누구든지 악마로 쉽게 형상화 하고 이후로는 진공을 만든다. 

스탕달 신드롬을 겪었던 때가 생각난다. 생각이 증발한다. 보고 있으나 보는 것은 없다. 정신은 무중력 상태다. 그 것이 대중 속에서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이런 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정신의 대표인 시와 물질의 대표인 호텔로 비교되는 욕망의 교차가 생각났다. 그래서 시-호텔 증후군이라 부르기로 했다. 포엠텔 신드롬 (Poemtel Syndrome).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욕망과 행복한 경험을 추구하는 욕망이 자신에게만 정당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타인의 자격을 재단한다. 누구나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참 피곤하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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