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려진 일회용 컵들의 무덤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윤혜경 기자】 “쓰레기통을 찾아서”

서울 한낮 기온이 30도를 훌쩍 웃돌아서일까. 서울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강남대로’. 특히 주말 저녁 서울 2호선 강남역에서 9호선 신논현역까지 이어지는 강남대로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 주위를 둘러보면 차가운 음료를 품고 있는 플라스틱 컵 차니를 손에 쥐고 걷는 사람들을 매우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더위에 지친 듯 차니를 손에 쥔 사람들은 차니가 품은 음료를 마시기 바쁘다. 그렇게 차니가 담고 있던 음료는 순식간에 동난다. 사람 손에 쥐어지기까지 긴 여행을 했지만, 음료가 소진됨과 동시에 쓰임새가 없어진 차니는 다시 또 떠나야한다. 바로 ‘쓰레기통’이 그 다음 여행지다.

그런데 혹시 이 강남대로에서 ‘쓰레기통’을 유심히 본 적 있는가.

강남역 11번 출구에서 신논현역 5번 출구까지 이어지는 길엔 총 42개의 쓰레기통이 설치돼 있는 반면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신논현역 6번 출구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쓰레기통이 하나도 없다. 때문에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신논현역 6번 출구까지의 길을 이용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일회용 컵이나 캔, 휴지 등의 쓰레기를 길거리에 투기하는 해프닝이 종종 있다. 이따금씩은 쓰레기통이 있는 맞은편에 건너가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도 목격된다.

같은 강남대로임에도 풍경이 이다지도 다른 이유. 이는 차도를 사이에 뒀을 뿐인 이 길은 한쪽은 강남구, 한쪽은 서초구 관할이기 때문. 두 구의 ‘쓰레기 철학’은 굉장히 다르다. 강남구는 길거리에 쓰레기통이 많아야 쓰레기가 없다고 판단했고, 서초구는 길거리에 쓰레기통이 있으면 쓰레기의 양이 늘어난다고 판단했다. 어느 구의 판단이 옳았을까?

사실 어떤 판단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순 없다. 각자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강남구는 길거리에 쓰레기가 없는 대신 전체적인 쓰레기의 양이 많았고, 서초구는 쓰레기의 양이 적었다. 그러나 서초구 주말 길거리에서는 쓰레기 무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됐다.

예전부터 서초구는 쓰레기통이 없기로 유명했다. 서초구는 자체 쓰레기 철학에 따라 지난 2012년 90여개의 쓰레기통을 모두 철거했다. 그렇지만 사람이 바글바글한 강남대로, 주말 밤이면 길거리에서 자주 목격되는 쓰레기 무덤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는지 서초구 측은 특단의 조치에 들어갔다. 무려 쓰레기통을 설치하기로 한 것.

흥미로운 것은 서초구가 분석한 쓰레기의 종류다. 서초구가 지난 2015년 12월부터 3차례 강남대로 쓰레기를 분석한 결과 무려 95%가 ‘재활용품’인 것으로 집계됐다. 그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 한 것은 바로 버려진 ‘플라스틱 컵 차니(36.4%)’와 ‘종이컵 여리(36.2%)’였다.

▲ 강남대로 중 서초구 쪽에 설치된 재활용수거함 ⓒ투데이신문

“서초구, 일회용 컵 형제 닮은 수거함을 설치”

결과를 반영해 서초구는 일반 쓰레기통 대신 ‘재활용품 수거함’을 설치했다. 전체 쓰레기 중 차니와 여리 즉, 일회용 컵 형제가 가장 많았다는 것을 착안해 수거함의 모양은 일회용 컵의 형상을 하고 있다. 높이 1.2m, 폭 0.5m의 초대형 일회용 컵 형제 5세트, 총 9개의 컵 모형이 지난해 5월 강남대로에 놓다. 차니 모형엔 각각 비닐류 쓰레기와 플라스틱 컵‧PET류, 종이컵 여리 모형엔 캔‧병류와 팩‧종이컵 등을 버릴 수 있도록 했다.

차니와 여리 형상을 한 쓰레기통 제작비용은 각 커피전문점에서 부담했다. 각각 스타벅스커피 코리아, 파리바게뜨, 커피빈, 엔제리너스커피, 그리고 지난해 카페쇼를 주최한 엑스포럼의 로고가 쓰레기통에 그려졌다.

▲ 재활용수거함을 비우는 서초구 미화원 ⓒ투데이신문

환경미화원들은 하루에 5번 정도 이 수거함을 비운다고 한다. 차니가 가장 많이 버려지는 여름에는 야간작업까지 동원해도 수거함이 넘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고.

환경미화원들이 수거함에서 꺼낸 봉지 안에는 차니와 여리가 나뒹굴고 있었다. 빨대를 비롯해 짝꿍인 리드, 컵홀더까지 그대로 껴있는 차니와 여리가 다수다. 일단 이 모습 그대로 수거한 후 작업장에 가서 다시 분류작업을 거쳐야한다. 누군가에게 휴식을 선사했던 음료가 그대로 들어있는 경우도 많다. 특히 차가운 음료를 마실 경우 얼음을 다 먹지 않고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 상태로 컵을 버리면 쓰레기통에서 음료가 새기도 해 수거함 바닥에는 양푼을 놓아둔다. 폭염이 연이어 지는 요즘은 악취가 굉장히 심하다는 게 환경미화원들의 설명이다.

이렇게 재활용 수거함을 설치한 결과, 길거리 곳곳에 쌓였던 컵들은 눈에 띄게 사라졌다. 그리고 서초구가 재활용 수거함에서 나온 쓰레기들을 분석한 결과 전체 쓰레기(하루 평균 625.14ℓ) 중 93%가 재활용 가능한 품목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 97%는 일회용 컵 형제 차니와 여리였다.

▲ 강남대로 중 강남구 쪽에 설치된 쓰레기통 ⓒ투데이신문

“처참하게 버려지는 일회용 컵 형제. 그리고 그들의 죽음”

몸에 품고 있던 음료가 바닥난 일회용 컵 형제는 너무도 쉽게 버려진다. 일회용 컵 형제의 형상을 본떠 만든 수거함처럼 컵을 버릴 장소가 잘 갖춰져 있다면 다행이지만,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누군가의 구둣발로 밟히거나 발로 채여 나뒹굴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쓰레기통을 발견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미 컵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도 굉장히 많다. 때문에 어떤 이들은 쓰레기통 위나 수거함이 아닌 곳에 컵을 살며시 내려놓고 도망가기도 한다. 어쩌면 이들에게 평평한 곳은 모두 차니와 여리를 처리할 수 최적의 장소이자 쓰레기통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쓰레기통이 아닌 곳에 차니나 여리가 놓여있으면 또 다른 사람들이 그 옆에 일회용 컵 형제를 버리기 시작한다는 것. 이는 깨끗한 곳에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는 죄책감이 동반되지만, 쓰레기가 하나라도 있는 곳 혹은 후미진 곳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죄책감이 덜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으로 안일하게 컵을 버린 행위가 나비효과처럼 커져 어느새 컵들의 무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임무를 다한 일회용 컵 형제는 한껏 더럽고 초라한 모습으로 거리 한편에 놓인다. 누가 그랬던가, ‘역할을 다 하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일회용 컵 형제는 이렇게 죽음 아닌 죽음을 맞이한다. 총을 사용하는 어떤 게임에서 HP가 바닥난 캐릭터가 처참하게 바닥에 고꾸라지는 것처럼, 음료가 소진된 컵들도 그 자리에 버려진다. 그리고 그들만의 무덤이 형성된다.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밤 붐비는 거리를 걷다 보면 ‘공동묘지’ 수준의 컵 무덤도 쉽게 볼 수 있다. 앞으로 차니와 여리의 공동묘지를 보게 된다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추모의 말 정도는 건네보는 건 어떨까.

※ 본 기사는 포털사이트 다음의 콘텐츠 크라우드 펀딩플랫폼 <스토리펀딩>에도 실렸습니다.

▲ 쓰레기통 위에 버려진 컵들 ⓒ투데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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