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BS 박재홍 앵커

독자여러분께 일 년여 만에 다시 인사드린다. 본 연재 “대한민국 삼국지, 군웅할거의 시대”는 소설과 정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또 다른 이야기’를 구성하여, 삼국지 등장인물과 현대 인물을 소개하고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해 독자와 함께 생각해 보려는 의도를 갖고 시작했다. 독자여러분이 아껴주신 덕에 지난 2016년 이 연재를 모아 『군웅할거, 대한민국 삼국지』가 출판되었다. 이 지면을 빌어 심심한 감사 인사를 드린다.

이전까지는 주로 ‘정치인’이나 ‘정치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으나, 앞으로 이어질 글에는 정치권 밖에 있는 인물을 등장시키고자 한다. 정치인이 바깥에 있다면 이들은 안쪽에 있다. 어찌 보면 안쪽에 있는 이들이 사회 곳곳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면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되어주고 있지 않은가 한다. 이제부터는 안쪽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물론 보다 근본적인 힘은 다수의 시민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연재에선 ‘정치인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가 잦을 수밖에 없다. 이 점 해량하시고, 예전과 같이 아껴주시기 부탁드린다.

이번 회의 등장인물은 박재홍이다. 박재홍은 2003년 CBS에 아나운서로 입사하여 ‘CBS TV뉴스’, ‘싱싱싱’, ‘CBS 퀴즈 서바이벌’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박재홍은 정치외교학과 출신답게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하고자 하는 뜻을 품고 꾸준히 노력하여 2014년부터 약 1년 간 자신의 이름을 건 프로그램인 “박재홍의 뉴스쇼”를 진행했으며, 현재 “굿모닝 뉴스 박재홍입니다”를 진행하고 있다. 한 길을 걸어왔고, 걸어갈 사람이며,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성취해 가는 사람이라 하겠다.

박재홍에 비유한 조인(曹仁)은 조조 진영이 자랑하는 일류장수다. 진수(陳壽)가 쓴 정사 『삼국지』를 바탕으로 보면 조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크고 작은 싸움에 출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장수에게 필요한 힘은 물론 수준 있는 지략까지 겸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소설 『삼국지』에서는 서서, 제갈공명, 주유 등 최고의 참모와 싸워 패하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어찌 보면 문관에 가까운 아나운서를 무장에 비유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으나, 박재홍에게는 무장의 힘에 비견할만한 꿈과 사회 변혁 의지가 있다. 우선 이 점에 착안하여 조인과 박재홍의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 조인(曹仁, 168-223)

꾸준히 성장하여 최고에 자리에 오르다

190년, 동탁은 후한의 황제인 헌제(獻帝)를 차지하여 정권을 잡고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에 원소, 조조를 비롯한 각 지역의 영웅들은 연합군을 결성하여 동탁 토벌전에 나섰다. 조조는 연합군에 가담하기 위해 의병을 모집했는데 이 때, 맹장 하후돈, 하후연이 휘하에 들어왔고, 며칠이 지나서 조인(曹仁)과 조홍이 각각 천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찾아 왔다.

조인은 조조의 사촌동생으로 활을 잘 다뤘고, 말을 잘 탔다. 조조는 조인에게 기병을 통솔하도록 했다. 조인의 기병부대는 193년에 조조가 서주(徐州)의 도겸(陶謙)을 공격할 때 빛을 발했다. 조인은 별동대를 이끌면서 도겸의 부하 장수를 무찔렀고, 본대에 복귀해선 도겸의 관할 지역 네 곳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도겸은 이 지역을 수복하려 했지만, 조인의 기병에게 패했다.

이보다 앞서 조조는 동탁이 죽은 뒤에 자신이 헌제를 차지하고 허도(許都)로 천도했다. 헌제는 조인의 공을 치하하여 광양태수(廣陽太守) 벼슬을 내려주었지만, 조조는 조인의 기량을 높이 사서 지역에 머물도록 하지 않고, 의랑(議郞)으로 자리를 옮겨 기병을 통솔하게 했다. 조인은 활도 잘 쏜 명사수였지만, 기병에 좀 더 잘 맞는 장수였던 것 같다. 이후 조인은 싸울 때 주로 기병을 이끌고 선봉에 서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선봉이 제압당하면 이후에 어려운 싸움을 할 가능성이 높고, 반면 첫 싸움에서 선봉이 승리하면 아군의 사기가 높아지면서 승기를 잡게 될 확률이 높다. 이래서 선봉장은 싸움을 잘 하거나, 용기 있는 장수가 맡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조조는 조인한테서 이와 같은 덕목을 발견하고 꾸준히 선봉장으로 기용하지 않았는가 한다.

이래서 일까. 소설 『삼국지』에선 조인은 자신의 용기와 지략을 믿고 섣불리 덤비다가 유비의 참모 서서(徐庶)에게 패전하고, 제갈공명이 유비의 휘하로 와서 치른 두 번째 전투에서 패하고, 오나라의 주유(周瑜)한테도 패하는 등 일류장수의 명성에 맞지 않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상대가 모두 『삼국지』에서 최고로 일컬어지는 참모였고, 조조는 몇 차례의 패배에 괘념치 않고 조인을 최전방과 전략요충지에 조인을 파견했다.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패한 뒤에 조인을 격전지인 형주지역에 남겨 두어 관우와 오나라 군대를 상대하도록 했다.

이렇게 보면 조인한테는 장수의 용맹과 아울러 그에 상응하는 지략과 안정감도 있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조인은 조조의 휘하에서 선봉 역할을 했고, 때에 따라 전략요충지를 지키는 등, 조조의 작전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균형 잡힌 장수로 성장해 갔다. 그 사이 꾸준히 크고 작은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음은 물론이다. 마침내 조인은 221년, 무관의 최고 직위인 대장군이 되었고, 같은 해에 대사마(大司馬)로 승진했다.

지략을 겸비한 장수

199년, 조조는 가장 강력한 군벌이었던 원소(袁紹)와 대결하게 됐다. 양 군은 황하(黃河)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는데, 조조가 허도를 비우고 나온 사이 원소는 당시 자신에게 잠시 의탁하고 있던 유비를 시켜 조조의 배후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자 몇몇 지역은 조조를 배신하고 유비의 편에 붙어버렸다. 조조는 앞뒤에서 강적을 상대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조조는 선뜻 작전을 내지 못하고 고민을 한다. 이 때 조인이 의견을 낸다.

“남쪽은, 현재 우리의 대군한테 목전의 위급함이 있어서 형세 상 서로 구원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비가 강한 군대를 이끌고 들이닥쳤으니 몇 고을이 배반한 건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원소의 군대를 이끈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용병을 못하고 있을 테니, 곧바로 유비를 공격하면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조조는 조인의 진언을 받아 들였다. 조인은 역시 기병을 이끌고 남쪽으로 가서 유비를 공격했다. 조인의 말대로 유비는 새로 부하가 된 병력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하고 패주했다. 유비를 격파한 조인은 여세를 몰아 배신했던 여러 고을을 모두 평정하고 복귀했다. 조인의 과감성과 침착함이 이 일화에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조인은 용맹한 장수이면서도 참모에 비해 뒤지지 않는 지략을 지니고 있었다. 최고의 전략가 중 한 명인 조조 역시 조인의 말을 잘 들어 주었다. 원소의 세력을 평정한 조조는 호관(壺關)을 포위했다. 조조는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성을 함락한 뒤에 적군 모두를 생매장하라!”

이런 호언장담이 적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 겁을 먹을까? 그렇지 않다. 적은 오히려 결사적으로 저항을 하게 된다. 이래서 몇 달이 지나도록 조조 군대는 호관을 함락하지 못했다. 조인이 의견을 낸다.

“성을 포위하면 반드시 적에게 살 수 있는 문을 보여줘서 그들이 살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주공께선 반드시 죽이겠다고 말하셨으니 저들이 사람들을 거느리고 스스로를 지키고 있는 겁니다. 게다가 이 성은 견고하고 식량도 많아서, 공격을 하면 아군이 죽게 되고, 지키고 있으면 시간만 지나갑니다. 지금 군대를 거느리고 견고한 성 아래에 있으면서 필사적인 적을 공격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결국 조조는 조인의 진언을 받아들였다. 조인의 말대로 포위를 느슨하게 하고 살 길을 열어 주자 성 사람들이 항복해 왔다. 여기에서 ‘몇 달’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처음부터 조인이 의견을 냈더라면 피차 힘들이지 않고 싸움을 끝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인은 조조의 명령에 따라 몇 달을 공격했고, 조조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되자 비로소 의견을 냈다. 이렇게 보면 조인은 상대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자신의 의견을 성급히 내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조인은 기병을 이끌고 신속하고 용감하게 적을 제압하는 장수이면서도 신중하게 판단하고 조심스레 의견을 내는 참모의 품성을 겸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두 가지를 겸비한 사람이었으므로 조조와 조비의 신뢰를 얻지 않았는가 한다.

“장군께선 진정 천신(天神)이십니다!”

그래도 싸움을 하는 장수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덕목은 ‘용기’가 아닐까 한다. 유리한 상황이건 불리한 상황이건, 그 상황에 동요되지 않아야 부하들이 장수를 신뢰하고 싸울 수 있다. 아마 『삼국지』에 등장하는 장수 모두에게 이런 용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용기를 부각해 주는 일화를 지니고 있는 장수는 흔하지 않다.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는 조인에게 강릉을 지키라 하고 퇴각했다. 얼마 후 오나라의 주유는 수만 명을 이끌고 조인을 공격해 왔는데, 이중 수천 명의 선봉부대가 성 근처에 도달했다. 조인은 적군의 수를 보고 성을 지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때 부하장수 우금이 소리친다.

“적이 턱밑까지 왔는데 나가서 싸우지 않는 것은 겁을 먹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는 지난 번에 패한 치욕을 씻어야 합니다. 저에게 500 명만 주신다면 한 번 결사전을 치르겠습니다.”

우금은 큰소리를 치고 나갔지만, 삽시간에 포위되었다. 이 모양을 본 조인은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우금을 구하러 나갈 준비를 한다. 주변에서 만류하기 시작한다.

“적군이 많아서 당해낼 수 없습니다. 설사 수백 명을 버린다한들 마음 아플 게 뭐 있겠습니까. 그런데 장군께서 직접 가시다니요!”

조인은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이 자신의 휘하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을 나갔다. 조인은 칼을 휘두르며 포위망을 뚫고 우금을 구해낸다. 정신없이 퇴각하다가 뒤를 보니 아군 기병이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하고 갇혀 있다. 망설임이 없다. 조인은 다시 포위망 속으로 들어가 이들을 구해냈다. 조인이 무사히 돌아오자 부하들은 감탄을 한다.

“장군께선 진정 천신(天神)이십니다!”

결국 이 싸움에서 조인은 결국 주유에게 패하지만 용기만큼은 인정받을 만하다고 할 수 있다.

219년, 관우는 형주성을 비우고 나와서 조조 진영을 공격했다. 조조는 우금과 방덕을 파견해서 관우와 맞서게 했지만, 우금은 생포되고 방덕은 처형당했다. 관우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고, 조조는 겁을 먹고 수도를 옮길 계획까지 세워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 조인은 전략요충지인 번성(樊城)을 지키고 있었다. 주변의 성이 모두 관우에게 함락된 가운데 조인은 고립됐고, 설상가상 이 때는 장마철이었는데, 관우가 둑을 터트려 번성에 수공(水攻)을 퍼부었다. 여러 장수들은 크게 당황했다.

“이번 싸움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적이 오기 전에 퇴각해야 합니다.”

조인 역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퇴각 준비를 하려는데 문관 만총이 만류한다.

“산골 물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열흘 안에 깨끗해질 겁니다. 만약 성을 버리고 달아난다면 황하 이남은 다시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장군께선 이 땅을 굳게 지키셔야 합니다.”

만총의 말을 들은 조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백마를 타고 성에 올라 소리친다.

“나는 위나라 왕(조조)의 명을 받들어 이 성을 지키겠다. 누구든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자는 목을 베겠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우선 병력이 적었고, 고립된 성이라 식량이 바닥을 보일 지경이었으며, 성의 곳곳이 수해를 입어 무너진 곳도 많았다. 그러나 조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우선 궁수 수백 명을 배치하여 적의 습격에 대비하도록 하고, 백성을 독려해서 흙과 돌을 날라 무너진 성곽을 수리했다. 조인은 이처럼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고 관우가 오기를 기다렸다. 관우는 대군을 이끌고 번성으로 왔다가 궁수들의 화살에 맞아 부상당하고 물러났다. 이후 조인은 동료 장수인 서황의 구원병이 올 때까지 번성을 잘 지켜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조인에게는 선봉장의 용맹이 있었으며, 동시에 침착한 성품과 예리한 지략도 있었다. 싸울 때 싸울 줄 알고, 지킬 때 지킬 줄 아는 장수였다. 화려하진 않지만 꾸준함이 있었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를 바탕으로 조인은 일류장수가 즐비한 조조의 진영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조조의 친인척이라는 점이 일정 부분 반영이 되었겠지만, 그보다는 이와 같은 조인의 장점이 좀 더 부각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조인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타의 일류장수에 비해 크게 눈에 띄지는 않으면서도 그들과 비교했을 때 손색이 없는 훌륭한 장수였다고 하겠다.

▲ CBS 박재홍 앵커

● CBS 박재홍(1976 - ) 앵커

지금도 성장하고 있는 사람

2014년 11월 아침 7시 30분, 김현정이 아닌 남자의 목소리가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온다.

“앵커는 바뀌었지만 권력에 대한 비판, 약자에 대한 배려, 이 땅에 소외된 곳을 향하는 CBS의 따뜻한 시선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2015. 2. 19. 미디어오늘>

박재홍은 이후로 약 1년 간 “박재홍의 뉴스쇼”라는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했다. 2003년 CBS에 아나운서로 입사한 이래 약 11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청취자에게 알린 셈이다. 이전까진 무명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비중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박재홍은 정치와 사회 분야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조조는 조인의 여러 능력 중에 ‘기병’계열 쪽 재능을 발견하고, 조인을 이 방면으로 육성했다. 이 말은 그만큼 조인이 그 방면에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희망 전공 목록에는 늘 정치학과가 자리 잡고 있었다. 유난히 정치에 관심이 많으셨던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정치학’이라는 이름이 주는 끌림이 어린 나에게는 매우 강렬했다. … 한국 정치학의 대표 학자 최장집 교수님의 한국정치론 수업을 듣고 있을 때마다 ‘와 정말 재밌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되었다.”<박재홍 외 7인, 『하버드는 공부벌레 원하지 않는다』, 시사IN북, 121쪽>

박재홍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나왔다. 이후 미국 하버드 대학 케네디 스쿨에서 행정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걸 배웠으리라고 짐작한다. 비록 학생을 가르치고 싶은 바람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조인이 기병에 장기를 지녔던 것처럼 박재홍은 시사프로그램에 필요한 조건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겠다.

“텔레비전 앵커를 비롯한 각종 뉴스 업무 외에도 음악콘서트 MC와 CBS 텔레비전 최초의 실험이었던 버라이어티 퀴즈 프로그램 MC, 라디오 DJ, 교양프로그램 MC 등에 이르기까지 아나운서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재미있게 일했고 행복했다.”<박재홍 외 7인, 『하버드는 공부벌레 원하지 않는다』, 시사IN북, 125쪽>

이처럼 박재홍은 조인처럼 여러 방면에 걸쳐 재능과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박재홍의 역량이 빛을 발하는 건 단연 시사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겠다. 7년 간 청취자의 사랑을 받았고, 그만큼의 명성을 지닌 “김현정의 뉴스쇼”의 뒤를 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고 하겠다. 김현정은 많은 청취자들에게 능력을 인정받은 진행자다. 그 후속으로 박재홍이 등장했다는 것은 그의 선배들이 능력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프로는 결과로 말하는 법이다. 박재홍은 “뉴스쇼”를 성공적으로 진행했고, 이를 인정받아 2016년, 제 43회 한국방송대상 아나운서 상을 수상했다. 그의 선배들과 대중이 조조가 되어 박재홍의 기량을 인정해 준 것이다. 조인은 조조의 아들 조비가 황제가 되었을 때 ‘대사마’가 되었다. 이렇게 보면 박재홍은 아직 ‘대사마’가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지금도 성장하고 있는 사람이다.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진정한 중립이다

2014년 12월 5일, 황당한 뉴스가 전해졌다. 뉴욕에서 우리나라로 와야 할 대한항공 여객기가 활주로로 가다가 ‘후진’을 한 사건이다.

“비행기 당장 세워. 나 이 비행기 안 띄울 거야.”

멈춰선 비행기에서는 박창진 사무장이 내렸다. 일등석에 타고 있던 조현아 당시 대한항공 부사장이 여승무원의 견과류 서비스를 문제 삼으면서 발생한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이다. <2015. 5. 22. 연합뉴스>

대부분의 언론에서 조현아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비판했고, 결국 조현아는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기에 이르렀다. 그럼 그 사이에 박창진은 어떻게 지냈을까.

“아무리 오너라고 하더라도 저에게 특별한 징계 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출근을 막을 수 없는 일. … 여지껏 성실히 임해 왔던 직원인데 그걸 강탈해 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출근은) 당연한 저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 … 여론이 마치 저와 조 전 부사장의 싸움인 것처럼 몰고 있는 부분이 저를 좀 안타깝게 했고 저를 고민하게 하는 부분. …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치주의 국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법을 어긴 부분이지 않겠냐.” <2015. 1. 23. 경향신문>

박창진은 여러모로 코너에 몰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여론’형성에 큰 역할을 하는 건 ‘언론’인데, 박창진은 이 ‘언론’에 상처를 입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저런 속내나마 밝힌 것도 언론을 통해서였다.

“박 사무장은 방송의 편집에 의해 자신의 의도와 달리 과도하게 부풀려진 부분 때문에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황이었고 편집에 대한 두려움도 호소했다. … 다행히 우리와 단독 인터뷰를 끝내고 나선 자기 입장을 잘 드러내 주는 인터뷰가 된 것 같다며 고마움을 표시했고, 우리 나름대로도 저널리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2015. 2. 19. 미디어오늘, 박재홍 인터뷰 기사 중>

조인이 진퇴양난에 빠진 조조를 설득하여 구해냈던 것처럼 박재홍 역시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인 박창진을 설득하여 인터뷰 자리까지 이끌어 냈고, 많은 국민이 진실을 알게 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아쉽게도 박창진은 현재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재홍의 역할을 폄하할 수는 없다고 본다.

2014년 11월 케이블 방송업체인 C&M 비정규직 노동자 109명이 해고된 일이 있었다. 이에 이들의 복직을 요구하며 역시 비정규직 노동자 2명이 서울 파이낸스 빌딩 앞 전광판에 올라 농성을 시작했다. 박재홍은 그 곳으로 달려갔다.

“스튜디오 앵커의 약점은 현장성이 없는 거잖아요. 방송의 진정성과 현장성을 높이기 위해서 전광판에 가보았습니다. 뉴스나 사진 등으로 보는 것보다 그분들이 전광판에서 느끼는 마음과 심경을 현장에서 직접 느끼고 싶었던 거죠. 광화문 현장에서 그분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내일 인터뷰할 <박재홍의 뉴스쇼> 박재홍 앵커입니다. 인터뷰 전에 얼굴 뵈려고 왔습니다’라고 전화 드리니까 많이 놀라셨던 것이 기억나네요. 그래도 전광판에 있는 노동자들 모습을 보며 직접 대화를 나눴고 현장 노숙하는 100여 명의 노조원들을 만났더니 방송에 많이 도움이 됐어요. 개인적으로는 그분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어요.”<2015. 2. 28. 오마이뉴스>

“그 이후 C&M 노사가 협상을 타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죠.”<2015. 2. 19. 미디어오늘, 박재홍 인터뷰 기사 중>

이처럼 박재홍은 여느 앵커와는 다른 구석이 있다. 일반적으로 앵커는 스튜디오 안에서 소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데 비해 박재홍은 뉴스가 있는 ‘현장’으로 달려 나간다. 그 발걸음 속에 ‘사회적 약자’를 위하는 마음이 있음은 물론이다.

“아침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의 경쟁이 너무 치열하고 이젠 CBS도 진보적 스탠스만으로 주목받기 어려워졌어요. 장기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도 불편하지만 재밌어서 듣게 되는 <뉴스쇼>를 만들고 싶어요. 당사자 중심주의로 가되 한쪽 진영만 편 들지 않고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접근한다는 믿음을 줘야 그 신뢰가 <박재홍의 뉴스쇼>의 힘이 될 거라고 봐요.”<2015. 2. 19. 미디어오늘, 박재홍 인터뷰 기사 중>

조인이 ‘적의 성을 포위할 때 살 길을 열어 줘야 한다’고 했던 것과 궤를 같이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권력에 대한 비판과 약자에 대한 배려 현장·당사자 중심주의는 계속 지켜나가겠다.”<2015. 2. 19. 미디어오늘, 박재홍 인터뷰 기사 중>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재홍은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진정한 중립”이라고 말하고 있다. 박재홍이 현재의 ‘조조 부자’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는 이유 중 하나라고 하겠다.

언제나 굿모닝

조인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일류장수에 비해 화려하진 않으나 용맹성과 침착함을 겸비하여 꾸준히 자기 역할을 수행하여 끝내 스스로 일류장수임을 증명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박재홍 역시 앵커에게 요구되는 자질을 모두 갖추고 꾸준히 성장하여 현재의 위치까지 도달했다. 손석희를 비롯한 국내 유명 앵커에 비해 지명도가 다소 떨어진다고 하겠지만, 내용면에서는 이들과 비교해도 큰 손색이 없다고 할 것이다. 박재홍도 조인처럼 스스로 최고임을 증명하고 있는 중이다.

“미디어가 전해 주는 진실의 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거짓 혹은 위선이 있을까? 사실 우리 사회갈등의 핵심은 나의 건너편에 있는 상대에게 거짓 혹은 위선이 있다고 쉽게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분법적인 전제는 결국 우리 사회 갈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한다. 하지만, 조금만 더 가슴을 열어 보면 진실의 건너편에 존재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라 또 다른 진실일 수 있다. 진실의 건너편에는 누군가의 거짓이나 위선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 눈물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한국아나운서연합회, 『아나운서 말하기 특강』, 다우, 231쪽, 「박재홍 아나운서」편>

역시 앵커 또는 언론인에게 요구되는 덕목 중 하나는 ‘진실’을 대하는 자세일 것이다. 박재홍은 ‘진실’을 여러 각도에서 살피려 하는 자세를 지니고 있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사회갈등’을 해소하려는 목표 의식을 지니고 있다.

“뉴스 과잉의 시대에 ‘나는 왜 뉴스를 소비하는가?’ 성찰적인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진다. 건너편에 존재하는 이들의 아픔,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좋은 시민들의 공동체가 이 땅에 속히 등장하기를 바라며 던진 질문인 것이다.”<한국아나운서연합회, 『아나운서 말하기 특강』, 다우, 231쪽, 「박재홍 아나운서」편>

▲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군웅할거 대한민국 삼국지 >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삼국지인물전> 외 5권

끊임없이 질문하기에 쉼 없는 성장이 가능하다. 이러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면 박재홍은 자신을 포함한 여러 사람이 본보기로 삼고 있는 손석희를 넘어서는 앵커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재홍의 말을 살펴보면 그는 ‘무언가가 되려하기 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살아왔고, 살아가지 않을까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하다보면 무언가가 되지 않을까?

박재홍은 2015년에 “박재홍의 뉴스쇼”를 그만두었고, 현재 CBS “굿모닝 뉴스 박재홍입니다”를 진행하고 있다. 박재홍의 앞날이 언제나 굿모닝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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