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천가방협동조합 조규남 이사장. ⓒ투데이신문

60~70년대 신월동 가방생산단지 탄생
IMF이후 가방 외국생산 늘어 성장 둔화

일일이 사람 손을 거쳐야 가방 완성돼
과학기술 발전해도 기계로 생산 불가능

양천구 곳곳 6000여명 인력 숨어 있어
제작인력 알리고자 가방협동조합 설립

대부분 50대 이상…청년 턱없이 부족해
조합 성장해 아파트형 공장 세우기 바라

【투데이신문 최소미 기자】 밖에서 보기엔 평범한 서울 어느 골목길. 그렇지만 서울 양천구 신월동 건물들에는 재봉틀을 하나씩 놓고 가방을 제작하는 가방 공장 장인들이 숨어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들의 하루를 쫓고자 기자는 지난 7일 신월동에 위치한 양천가방협동조합 사무실을 찾았다.

오전 8시30분, 기자는 양천가방협동조합 사무실에 도착했다. 장영일(33) 과장은 “추운데 고생이 많다”며 기자에게 믹스커피를 내주며 신월동 가방 공장들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신월동에 수백 개의 가방 공장이 있어서, 기자가 버스정류장에 내려 조합 사무실에 오는 길에도 공장 서너 개는 지났을 거라고 했다. 놀란 기자가 “걸어오면서 공장은 보지 못했다”고 하자 장 과장은 “대부분 일반 가정집이나 지하에 위치해 있어서 못 보셨을 거예요. 제가 안내해줄게요”라며 웃어보였다. 본공장을 중심으로 부분공장 몇 개를 둘러보기로 결정한 뒤 사무실을 나섰다.

장 과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신월동 골목을 걷다 보니 어느 건물 지하 1층에 위치한 ‘승민산업’에 다다랐다. 가파른 계단을 하나둘 내려가자니 멀리서부터 재봉틀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이미 4명의 사람들이 재봉틀 앞에서 씨름하고 있었다. 무표정으로 작업에 열중하던 그들은 기자를 보더니 금세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맞아줬다.

이 4명은 가족이다. 조합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조규남(58)씨와 그의 아내 박순옥(57·여)씨, 박씨의 동생 박옥미(54·여)씨와 그의 딸 오서아(27·여)씨. 가족끼리 모여 일하는 게 힘들지 않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들은 한바탕 웃더니 가족이라서 더 좋다고 말했다.

‘본공장’ 역할을 하는 승민산업은 지퍼나 천 등의 부품들을 각 업체에 주문하고, 승민산업에 부품들이 도착하면 신월동에 퍼져있는 몇 개의 ‘부분공장’들이 이를 조립한다. 이와 같은 기초 작업이 끝나면, 승민산업에서 최종적으로 다시 이를 조립하고 완성한다.

   
▲ 가방 앞주머니 부분을 작업하고 있는 조규남 이사장. ⓒ투데이신문

조규남 이사장은 가방의 앞주머니 부분 작업을 하고 있었다. 보통 70~80개의 부품이 들어가지만, 같은 가방이라 할지라도 종류가 다양하기에 간단한 것에는 20개부터 복잡한 것에는 100개가 넘는 부품이 필요하기도 한다. 조씨는 자부심을 느끼듯 “그 부품들을 다 맞춰나가는 거예요. 퍼즐 맞추듯이. 만약 80개 쪼가리 중 하나만 잘못돼도 다 뜯어야 해요”라고 설명했다.

“가방은 기계가 그냥 찍어내는 줄 알았다”는 기자의 말에 조씨는 “그렇죠. 누구나 가방 한두 개는 갖고 있지만 생산 과정을 모르더라”며 웃어보였다. 가방 제작이란 하나하나 사람 손이 들어가야 하는 작업이라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가방을 기계가 그냥 찍어낼 수는 없다고 한다.

전라남도 출신인 조씨는 고향 아저씨를 따라 서울에 올라와 가방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벌써 43년 전 일이다.

그는 “그 당시엔 어디에나 환경이 안 좋았잖아요. 숙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공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다가 밥 먹을 때 되면 치우고 먹고, 잘 때 되면 치우고 자고. 굉장히 힘들었죠”라고 과거를 회상했다. “어렸을 때부터 배운 게 이것밖에 없어서 이것만 하고 있네요. 힘이 좀 들어서 그렇지, 나이 먹어서도 할 수 있는 직업이에요”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 가방 손잡이 부분을 작업하고 있는 박순옥씨. ⓒ투데이신문

박순옥씨는 말없이 재봉틀에 조기대를 받쳤다. 조기대는 재봉틀의 바늘이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준비를 끝낸 그는 본격적으로 배낭 손잡이 부분의 박음질을 시작했다.

직장에 다니던 박순옥씨는 27년 전 조씨의 제안으로 가방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고 결혼까지 하게 됐다. “직장도 많이 다녔는데, 요즘엔 기술이 있어야지 먹고 살 수 있잖아요. 이 나이에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게 좋죠. 식구끼리 하다 보니까 이 일로 두 아들들을 다 가르쳤네요”라며 웃는 그의 얼굴에서는 보람도 느껴졌다.

지금은 능숙하게 재봉틀을 다루는 그도 처음엔 많이 다쳤다. 재봉틀 바늘에도 많이 찔리고, 가위로 손 살점이 잘린 적도 있다. 게다가 재봉틀 작업을 할 땐 천을 꾹꾹 눌러줘야 하니 손가락 힘도 많이 든다. 그의 손톱은 그간의 세월을 보여주듯 여기저기 갈라져있었다.

이 일을 하며 보람찰 때가 언제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가방을 완성할 때, 그리고 자신이 만든 가방을 다른 사람이 매고 다니는 모습을 봤을 때라고 답했다. “우리가 만든 가방 많이 봤죠. 특히 얼마 전에 한창 쌤소나이트 가방이 유행했잖아요. 근데 그걸 우리가 다 만든 거거든. 기분이 새로웠어요. 내가 만든 가방.”

   
▲ 가방 앞주머니의 마찌 작업을 하고 있는 박옥미씨. ⓒ투데이신문

가방 앞주머니의 마찌(천 부품 연결) 작업을 하고 있던 박옥미씨는 5년 전 언니와 형부를 따라 일을 시작했다. 그는 “다른 분들 얘기 들어보면 엄청 힘들게 배운다고 하던데, 저는 식구들이 잘 가르쳐줘서 비교적 편하게 배운 것 같네요”라며 활짝 웃었다.

실수는 없었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많았죠”라고 대답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왔잖아요. 모르고 그냥 하다 보니 다 실수였더라고요. 지금도 일하다 보면 실수할 때가 있어요.”

승민산업 사람들은 월요일부터 토요일,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한다. 일이 많으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도 한다. 12월부터 1월은 신학기를 맞아 한창 바빴지만, 2월과 3월은 일이 가장 없을 때라고 한다. 보통 2~3명이 일하는 부분공장들에 비해 본공장인 승민산업은 규모가 큰 편이다. 일거리가 많을 땐 일당을 받으며 단기간 작업하는 기술자들을 쓰기도 한다.

   
▲ 로고를 천에 박음질하고 있는 오서아씨. ⓒ투데이신문

오서아씨는 한쪽에서 컴퓨터 재봉틀을 사용해 조그만 로고를 천에 박음질하고 있었다. 컴퓨터 재봉틀은 일반 재봉틀과는 달리, 패턴을 입력하면 그대로 박음질을 해줘 정밀한 작업이 필요할 때 많이 사용한다.

그는 “23살에 시작했으니까 이제 5년차에 접어들었네요. 재봉틀 바늘이 워낙 빠르다 보니 처음엔 손을 많이 찔리기도 했죠. 그래서 좀 힘들기도 했는데 손이 익고 나니까 가방 하나 만들 때마다 보람을 느껴요”라며 미소지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조민우(32)씨가 들어왔다. 조규남 이사장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업체에서 배송된 부품을 조그만 부분공장에 배달하고, 부분공장에서 작업이 끝나면 이를 다시 수거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조씨는 부품 몇 봉지를 밴에 싣고 다른 공장으로 갈 준비를 했다. 기자도 조씨를 따라 밴에 올랐다.

   
▲ 부분공장으로 이동 중인 조민우씨. ⓒ투데이신문

보통 가방 하나를 만드는 데 10여개의 공장이 힘을 보탠다. 이전에는 한 공장에 작업을 몰아 라인 한 바퀴를 돌면 가방이 나오게끔 작업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문 수량이 줄어들어 한 공장에서 작업하면 수익이 나지 않아, 공장들은 어쩔 수 없이 신월동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졌다. 공장 몇 개는 부천시 원종동까지도 퍼져있다고 한다.

언제부터 이 일을 시작했냐는 기자의 물음에 조씨는 “너무 어릴 때부터 해서 기억이 안 난다”며 웃었다. 부모님이 일을 하다 보니 조씨는 초등학생 때부터 친형과 이것저것 만들어보기도 하고, 중학생 때 본격적으로 재봉틀을 다뤘다. 그렇게 어릴 땐 아르바이트처럼 공장에서 일하다 20살이 넘자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씨는 신월동 어느 골목에서 밴을 세우고 트렁크에서 부품이 가득 든 봉지를 꺼내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따라 들어간 조그만 가정집에서는 김종순(52·여)씨가 작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평범한 집, 그렇지만 재봉틀을 놓고 조합원으로서 가방 만드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 노트북 수납공간을 작업하고 있는 김종순씨. ⓒ투데이신문

조씨는 김씨의 집에 부품 봉지들을 놓아두었다. 조씨의 간단한 설명 후 김씨는 작업에 임했다. 김씨는 배낭 속 노트북 수납공간을 박음질하는 담당이다. 김씨가 박음질한 조각이 이후 배낭 등판과 만나면 튼튼한 노트북 수납공간이 완성된다.

김씨는 “사람들 다 기계로 가방 찍어내는 줄 알죠. 그렇지만 보세요. 기계로 찍어내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따지면 가방 전혀 비싼 게 아닌데 사람들은 다 사치로 생각하더라고요. 가방 비싸다고 하지 말고 모두들 기분 좋게 사서 썼으면 해요”라며 작업에 열중했다.

김씨의 집에서 나온 조씨는 다시 밴에 올라 다른 부분공장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부분공장들의 존재는 어떻게 알게 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일반 가정집에서 재봉틀을 돌리는 곳이 많이 숨어있거든요. 다른 분들을 통해서 소개를 받을 때도 있고, 아니면 일감을 달라면서 그분들이 먼저 연락할 때도 있어요”라고 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씨는 다시 어느 골목에 밴을 세우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따라 지하에 내려가니 이번엔 두 명이 작업하고 있었다.

   
▲ (왼쪽부터) 가방 내부를 작업하고 있는 이예영씨와 박노진씨. ⓒ투데이신문

이예영(55)씨와 박노진(55)씨는 가방 내부 마찌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재봉틀 사이로 천과 지퍼 부분을 밀어넣자 순식간에 한쪽은 박음질되면서 바로 옆의 천이 잘려나갔다. 박음질이 되는 동시에 옆의 필요 없는 천을 오릴 수 있는 재봉틀이다. 이씨는 “옛날엔 이걸 먼저 다 박아놓고 옆을 가위로 다 오렸어요. 세상 많이 좋아졌죠”라며 웃었다.

조씨는 이씨에게 부품을 전달하고 어떻게 작업할지 설명한 뒤 다시 밴에 올랐다. “이렇게 일일이 부품을 조립하다니 손이 정말 많이 가는 일인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조씨는 브랜드 이름만을 선호하는 사회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보통 명품은 하나하나 손으로 만들고, 일반 브랜드는 기계로 공장에서 찍어내는 줄 알죠. 그런데 명품이랑 일반 브랜드를 옆에 놓고 비교하면 솔직히 똑같아요. 명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일반 브랜드 제품도 만드니까요. 다만 부품 자재를 어떤 걸로 썼는지, 그리고 브랜드 이름의 차이죠. 그렇지만 소비자들은 모르죠. 브랜드 이름만 보고.”

이번엔 다른 본공장으로 향했다. ‘익산개발연구소’다. 승민산업과 비슷한 규모의 이 공장에서는 7명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누구도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와 재봉틀 소리가 어우러져 다소 시끌벅적했다.

   
▲ 지퍼에 슬라이더를 끼우고 있는 김재섭씨. ⓒ투데이신문

김재섭(62)씨는 지퍼 슬라이더를 달고 있었다. 나무조각에 고정된 쪽가위에 슬라이더를 끼워놓고, 43년 경력의 김씨가 지퍼를 양쪽으로 슥 밀어 넣으니 순식간에 지퍼에 슬라이더가 달렸다. “40년 하면 이렇게 지퍼를 순식간에 완성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니 “이건 40년 안 해도 할 수 있어”라며 웃으셨다.

김씨도 조규남 이사장과 비슷하게 서울에 올라와서 일을 시작했다. 그는 “70년대 초반이었나, 어린 나이에 초등학교 달랑 졸업하고 올라왔어요. 경제적으로도 온 나라가 어려웠던 통에 먹고 살려고 이 직업으로 뛰어들어서 지금까지 하고 있네요. 후회는 안 해요. 나이 먹어도 할 수 있으니까. 하기 싫으면 자율적으로 안 해도 되니까요. 그게 자영업의 이점 아니겠어요”라고 말하면서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시곗바늘이 정오를 가리켰을 때 기자는 장 과장과 밥을 먹었다. 공장에서는 대부분 작업하던 자리를 치우고 밥을 차려먹거나, 집이 가까운 사람들은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온다고 한다. 장 과장은 자연스레 신월동과 조합 설립 얘기를 꺼냈다.

김포국제공항과 가까운 신월동은 소음피해 지역으로 분류돼 상대적으로 세가 저렴한 편이다. 60~70년대 자연스레 가방 공장이 형성됐고, 집에서 개인적으로 재봉틀을 돌리는 사람들도 생겼다. 대부분의 공장이 일반 가정집이나 지하 1층에 위치한 탓에 신월동 주민들도 가방공장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그렇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푸마, 나이키, 데상트, 뉴발란스, 쌤소나이트 등의 OEM을 도맡아 할 정도로 ‘가방 국내생산’에서 신월동은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IMF 이후 국내경제가 위기를 겪으며 기업들은 싼 인건비를 찾아 중국이나 베트남, 몽골 등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신월동 가방 공장들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다 지난 2015년 5월, 몇몇 사람들이 힘을 모아 조합을 만들기로 뜻을 모았다. 신월동 가방공장의 존재를 더 많이 알리자는 취지에서였다. 여기저기 퍼져있는 공장 인력들에게 조합 가입도 권유했다. 가입하면 좋다는 말만 듣고 가입 서류에 서명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23명의 사람들이 양천가방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초기엔 10여명의 임원진들이 사비를 탈탈 털어 사무실을 마련했고 컴퓨터도 없어 양천구청에서 사용하던 것을 가져왔다. 그렇지만 조합은 조금씩 성장했고, 조합의 존재가 알려지니 가방 제작 의뢰도 더 많아졌다.

그만큼 조합은 조합원들의 일감이 끊이지 않도록 노력해왔다. 가방 제작 의뢰를 받으면 장 과장이 제작수량, 납기일, 지급 비용 등의 정보가 담긴 문자메시지를 조합원들에게 보낸다. 일감이 많아 바쁜 조합원들은 일을 받지 않고, 현재 하는 일이 끝나 가는데 다음 일감이 없다면 일을 받는다. 이렇게 조합원들은 일감을 지속적으로 받아왔고, 이러한 장점을 듣고 새로 가입한 사람들도 늘어 현재 조합원은 170여명이다. 지난해 6월에는 독자브랜드 ‘란트(LANTT)’도 만들었다.

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조규남 이사장에 따르면 6000명 이상이 양천구 여기저기서 재봉틀을 돌리고 있다. 재봉틀을 한두 개 놓고 하는 부부도 많고, 홀로 작게 일하는 할머니들도 많다고 한다.

이들의 인건비는 많지 않은 편이다. 예를 들어 가방 제작의 여러 작업 중 지퍼에 슬라이더를 끼우는 작업의 인건비가 개당 50원이라고 가정해보자. 가방 3000개를 만든다고 했을 때, 한 가방에 지퍼 3개가 들어간다 치면 총 9000개의 지퍼 작업을 해야 한다. 작업이 모두 완료돼야 45만원을 받는 것이다. 이렇듯 인건비가 개당 200원인 것부터, 적은 건 개당 10원인 것도 있다. 신월동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일하며 자식들을 학교에 보냈다. 기자는 ‘티끌 모아 태산’이란 말을 떠올렸다.

오후 1시, 조합 사무실에 가니 미팅을 위해 한 업체 사람들이 도착해있었다. 장 과장이 직접 미팅에 임했다. 미팅은 보통 일주일에 3~4개, 많으면 10개까지도 생긴다.

   
▲ (왼쪽부터) 제작할 가방에 대해 회의하고 있는 A사 사람들과 장영일 과장. ⓒ투데이신문

노트북을 넣는 용도의 가방을 의뢰하러 온 A사의 이모(37)씨는 가방 주문이 처음이라면서 “회사에서 가방을 새로 제작하게 됐는데, 아무도 가방과 관련된 지식이 없으니 처음엔 무턱대고 동대문으로 향했어요. 그런데 양천가방협동조합에서는 의뢰하고자 하는 가방과 관련해 세부적인 사항까지 상담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고 바로 이쪽으로 왔어요”라고 설명했다.

그는 “가까이 살면서도 신월동에 가방 공장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몰랐어요. 최근 개인이 직접 물품을 만드는 DIY가 늘어났는데 이를 상담할 수 있는 환경이 한국은 외국에 비해 열악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이렇게 방문해 직접 상담하고 내가 원하는 물품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죠”라며 조합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가방을 의뢰하는 미팅은 일주일에 3~4번 정도다. 바쁠 때는 10번까지도 잡힌다. 그렇지만 이중 성사되는 건 10~20%다. 비싸다는 이유에서다.

장 과장은 “지금은 중국도 인건비가 올라서 베트남, 몽골까지 넘어갔다더라고요. 지하상가 같은 데서 에코백을 만원 정도에 팔아요. 죄다 중국산이죠. 그러니 저희에게 에코백을 의뢰하는 사람들은 비싸다고 가버려요. 저희는 7~8000원에 만드는데, 그렇게 해서는 본인들 이익이 많이 없으니까요”라고 토로했다.

이전의 중국은 10만개 혹은 5만개 이상이 아니라면 의뢰를 받아주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소량생산도 받아준다고 한다. 때문에 신월동 사정은 더 어려워졌다. 중국보다 단가가 10~20% 비싸도 이를 감수하며 국내 생산을 고집하던 회사들도 하나둘 중국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장 과장은 “그래도 요즘엔 젊은 청년들이 많이 와서 가방을 의뢰해요. 아이디어도 다양하고 좋더라고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장 과장이 갑자기 나갈 채비를 했다. 가방 포장 용도의 비닐을 사러 가는 것이다. 가방 샘플 하나를 챙겨 장 과장은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같은 신월동이지만 걷기엔 멀어서 버스를 타고 다닌다. 매번 발품을 팔아 재료들을 산다고 한다.

“가벼운 건 제가 이렇게 직접 가서 살 수 있지만 무거운 재료들은 사장님들께 (가져다달라고) 부탁을 많이 해야 해요. 그런 사소한 것들에서 시간이 많이 소요되니까 조합에서 차를 한 대 더 사려고 계획 중이에요.”

시내버스를 타고 정류장 3개를 거친 뒤,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니 비닐가게가 나왔다. 가게 한편에 놓인 책상 위에 장 과장이 가방 샘플을 놓자 비닐가게 사장이 줄자를 꺼내 가방 사이즈를 쟀다. 그러더니 비닐로 가득한 선반을 뒤적이다 금세 비닐 뭉치를 들고 왔다. 장 과장은 사장에게 돈을 건네고 가게를 나섰다.

   
▲ 비닐을 사러 가기 위해 신월동을 걷고 있는 장영일 과장. ⓒ투데이신문

경기도 수원시에 살던 장 과장은 고등학교 때부터 조민우씨와 친구였다. 조씨의 집이나 다름없었던 승민산업에 함께 들락거리며 종종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2015년 조씨가 가방 브랜드 사업을 제안해 결의를 다지고 신월동으로 왔다. 간단히 재봉틀을 돌리기만 했는데 그 사이 협동조합이 만들어졌다. 신월동에는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젊은 장 과장이 조합에 귀속돼 사무적인 일을 하기 시작했다.

힘들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장 과장은 일은 힘들지 않는데 인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조합이 생긴지 2년이 다 돼 가는데 그 동안 계산 업무, 자재 발주, 미팅도 제가 다 했어요. 시간이 안 되니까 정신없이 일했죠.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니까 업무 자체는 힘들지 않은데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힘들었어요. 얼마 전 한 명을 더 고용해서 이제야 좀 숨을 돌릴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 힘든 기색은 느낄 수 없었다.

장 과장은 청년들이 조합에 더 가입해야 신월동 가방공장이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신월동 가방 제작 인력들이 대부분 50대에서 70대 사이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10대, 20대 시절을 보내셨던 분들이 서울 와서 기술 배우셨어요. 다들 경력이 30~40년은 되시는 거죠. 그만큼 기술력은 좋은데 청년들이 없어요. 사장님들 모두 오래 하셨으면 좋겠지만 10년, 20년 지나면 손이 떨리시거나 눈도 침침하셔서 일 잘 안 되실 텐데. 그러면 신월동 가방단지가 죽는 거예요. 국내생산을 원칙으로 하는 업체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외국으로 빠지겠죠. 그렇게 한국 제조시장이 그렇게 망하면 가방의 단가는 올라갈 수밖에 없어요. 그 리스크는 소비자들이 다 부담하겠죠. 그걸 막으려면 젊은 사람들이 많이 필요해요. 요즘 20대들은 한쪽에는 서류가방, 한쪽에는 노트랑 펜을 들고 일하는 것만 좋아하지, 공장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잖아요. 그런 인식들을 빨리 깨버리려고 해요. 제가 조합에서 노력해서 청년들을 많이 끌어모아야죠.”

   
▲ 왼쪽부터 조합 자체브랜드 란트, 청년 브랜드 JO가 만든 가방들 ⓒ투데이신문

조민우씨와 장 과장, 오서아씨는 신월동 가방단지에서 몇 안 되는 ‘청년’들이다. 조씨의 제안으로 세 명은 지난해 ‘JO’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다. 디자인부터 제작, 포장과 판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자체적으로 진행했다. 특히 지난해 12월 ‘웜홀’이라는 이름의 가방으로 진행한 크라우드 펀딩은 272%를 달성하며 인기를 끌었다. 올해엔 같은 가방의 다른 색상으로 2차 크라우드 펀딩도 진행할 예정이다.

조씨는 “유명 브랜드에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좋은 자재랑 원단을 썼어요. 크라우드 펀딩에서는 10만원대에 판매했는데, 브랜드 네임이 붙으면 30만원은 쉽게 넘을 거예요”라며 가방을 소개했다.

세 청년들은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거나 조합 일을 하고 저녁엔 머리를 맞대어 JO 브랜드에 관해 논의한다고 한다. 아직은 시작 단계에 있는 브랜드 이름이 더 알려지면 청년들도 좋고, 일이 많아지면 조합에도 일감을 제공할 수 있다.

오서아씨는 “JO 브랜드가 더 커지기 전까지는 조합 일에 열중해야죠. 브랜드가 더 크면 저희도 좋고 조합도 좋죠”라며 미소를 띠었다. 이들의 노력이라면 머지않아 브랜드 이름이 널리 알려질 것이라고 기자는 생각했다.

오후 4시, 기자는 다시 승민산업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다른 작업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전엔 가방 부품을 나르던 조민우씨도 이번엔 재봉틀 앞에 앉아 주머니 부분 박음질에 열중하고 있었다.

   
▲ ⓒ투데이신문

박옥미씨와 오서아씨는 오전에 작업했던 것을 들고 바닥에 앉아 가위를 들었다. 부품들을 박음질해서 하나로 연결할 때, 하나의 박음질이 끝날 때마다 재봉틀에서 빼면 비효율적이니 한 번에 여러 개를 박음질한 뒤 나중에 가위로 중간 중간을 잘라내는 작업이었다.

조각조각 널브러진 부품들을 보며, 가방의 형태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아직 멀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기자가 “현재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됐나”라고 물었더니 박씨는 “거의 다 됐다”고 답했다. 기자가 놀라자 박씨는 한껏 웃어 보이며 “이렇게만 봐서는 잘 모르겠죠? 부분공장들에서 밑작업(기초작업)을 다 해오면, 내일 저녁쯤엔 마무리작업 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박씨는 “이렇게 가방 완성되는 걸 보고 있으면 참 뿌듯해요. 또 가방마다 모양이 같은 듯 조금씩 달라서, 매번 퍼즐을 맞추는 것 같은 재미도 있어요”라며 웃음 지었다.

부인과 아들 옆에서 작업에 열중하던 조 이사장에게 꿈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신월동에 아파트형 공장을 세우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경인고속도로 중 서인천에서 신월동까지 이어지는 구간의 지하화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만큼, 지하화되는 고속도로의 지상에 아파트형 공장을 마련해 가방도 효율적으로 만들고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가방도 판매하겠다는 취지다.

“지금은 공장들이 뿔뿔이 있잖아요. 아파트형 공장이 생기면 처음 재단부터 박스 포장까지 한 번에 할 수 있겠죠. 그 안에 탁아시설도 마련해서 청년들은 거기에 아이를 맡겨놓을 수도 있고요. 또 공항이랑 가까우니 외국인들이 이쪽으로 관광 오면 저희 브랜드를 판매할 수도 있죠. 그렇게 하는 게 조합 임원진들 모두의 가장 큰 목표이자 꿈이에요.”

오후 6시, 기자는 신월동을 나섰다. 멀리 골목길 사이에서 재봉틀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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