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데이신문

14살, 대방동 신발공장서 잡일하며 기술 배워
2년 전, 이름 건 ‘JS슈즈디자인연구소’ 오픈
명장 수제화 선발대회서 1호 명장으로 선정돼
수제화 기술 배우려는 제자들 볼 때 보람 느껴
‘구두 박물관’을 세울 그날까지 수제화 만들 것

‘좋은 신발이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
지난달 24일, <투데이신문>은 47년째 수제화를 만들고 있는 JS슈즈디자인연구소 대표 전태수 장인을 찾았다. 로또가 당첨되면 지금 당장이라도 구두 박물관을 세우고 싶다고 말할 만큼 수제화에 대한 열정과 애정으로 똘똘 뭉친 그의 하루를 함께했다.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제법 차가워진 공기가 옷깃을 스치던 출근 시간, 기자는 JS슈즈디자인연구소 오픈 시간에 맞춰 성수역에 도착했다. 각종 수제화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연무장길을 따라 걷다 보니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빨간 구두가 JS슈즈디자인연구소에 다다랐음을 알렸다. 바람을 타고 솔솔 풍기는 새신발 냄새를 따라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니 연구소의 주인인 수제화 장인 전태수(61) 씨가 벌써 출근해 청소를 하고 있었다. 전씨는 들고 있던 빗자루를 잠시 내려두고 멀리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며 달달한 믹스커피 한 잔을 내어줬다.

   
▲ ⓒ투데이신문

그와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둘러본 연구소는 입구부터 내부까지 각종 수제화로 가득했다. 남성화부터 시작해 여성 워커, 단화, 힐 등 없는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종류의 수제화로 빼곡했다. 평소 기성화에서 보기 어려운 독특하고 화려한 디자인에 눈길도 마음도 모두 빼앗겨버렸다. 옆에서 물끄러미 기자의 신발을 바라보던 전씨는 수제화 한켤레를 주더니 신어보라고 권유했다. 맞춤 제작을 한 것도 아닌데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마냥 발에 꼭 맞아떨어져 아주 편안했다. “오래 걸어 다니거나 서 있는 사람이 신으면 좋을 것 같아요”라는 기자의 감탄에 전씨는 “그래서 종종 연예인들의 무대용 신발 주문도 들어온다”며 가수 싸이가 강남스타일 활동 당시 신었던 신발을 꺼내 보여줬다. 싸이가 수 시간 무대 위에서 열정적인 무대를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전씨가 만든 편한 신발 덕분이지 않을까 싶었다.

   
▲ 싸이가 신었던 구두 ⓒ투데이신문

짧은 담소를 뒤로한 채 전씨는 다시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그는 매일 오전 8시쯤 출근해 연구소를 정리하고 직원들에게 작업을 분배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연구소에는 전씨를 포함해 총 4명이 손발을 맞추고 있다. 전씨 혼자서 모든 일을 하기에는 시간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전씨는 주로 주문 들어온 신발들의 패턴을 뜨고 디자인에 맞게 가죽을 골라 재단한다. 수제화 제작 과정에서 뼈대를 만드는 일종의 기초 공사인 패턴 작업을 소홀히 하면 절대 좋은 신발이 나올 수 없다. 어쩌면 전씨가 가장 막중한 임무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라스트 공장 ⓒ투데이신문

패턴 작업에 앞서 전씨는 필요한 재료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 나설 채비를 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업체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필요한 것들을 직접 구매한다. 여유롭게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그의 자전거를 따라 도착한 곳은 ‘라스트’ 공장이었다. 라스트는 플라스틱이나 나무로 만든 외형으로 신발의 모양과 사이즈를 결정짓는 중요한 도구다. 라스트는 종류는 발 모양과 사이즈, 신발 디자인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때문에 연구소에도 이미 수백개의 라스트가 있지만 필요에 따라 종종 새롭게 제작한다고 했다. 공장에는 연구소에 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종류의 라스트가 쌓여있었다. 전씨의 도움을 받아 특별히 공장의 내부도 구경할 수 있었다. 주문에 맞게 라스트를 깎은 후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어주고 사이즈와 업체명을 새기는 넘버링까지 거치고 나면 모든 공정이 끝난다.

   
▲ 깔창 공장 ⓒ투데이신문

다음으로 향한 곳은 깔창 공장이었다. 깔창은 신발 모양과 사이즈에 따라 각기 다른 철형으로 찍어낸다. 그런 다음 깔창의 테두리 표면을 거칠게 만들어 준다. 본드를 발랐을 때 흐르지 않고 가죽과 잘 붙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나서 표면이 거칠어진 테두리에 가죽과 깔창을 연결할 이음매를 만들기 위해 깊게 홈을 파주고 주문에 맞게 넘버링을 새긴다. 공장 주인인 이씨는 자부심 가득 찬 목소리로 “두께, 신발의 용도에 따라 깔창의 종류도 천차만별”이라며 “아무것도 아닌듯해도 많은 과정을 거친 후에야 탄생한다”고 설명했다.

   
▲ 주문서 ⓒ투데이신문

연구소로 돌아온 전씨는 서둘러 패턴 작업에 돌입했다. 손님이 오면 먼저 발 모양을 그리고 사용할 가죽의 종류와 색상, 디자인, 굽높이 등에 대해 꼼꼼하게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패턴 작업에 착수한다. 요구 사항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이것저것 적어 놓은 주문서에서 그의 꼼꼼함이 엿보였다. 전씨는 이렇게 준비를 해도 손님이 마음에 안들어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했다.

   
▲ 패턴 작업 ⓒ투데이신문

책상 앞에 앉은 전씨는 주문에 맞는 라스트를 고르고 가장 먼저 발바닥 부분의 패턴을 떴다. 발바닥 굴곡에 맞춰 모양을 잡은 참빗을 그대로 갈색 패턴지 위에 올려 따라 그렸다. 그리고는 모양에 맞게 패턴 뜨는 용으로 제작된 칼을 이용해 선을 따라 패턴지를 오렸다.

두 번째로 발등을 감싸는 부분의 패턴을 뜨기 위해 라스트에 테이프를 겹겹이 붙인 후 필요 없는 부분을 도려냈다. 그리고는 나머지 부분을 조심스럽게 뜯어내 패턴지 위에 옮겨 붙이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나이프를 이용해 모양에 맞게 패턴지를 오렸다. “가위로 오리는 것이 더 정확하고 쉬울 것 같다”는 질문에 “칼로 오려내고 사포로 문질러줘야 표면이 울퉁불퉁하지 않고 매끈하다”고 했다.

한참 패턴을 뜨는데 몰두하던 전씨가 “발 모양만 봐도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대충은 알 수 있다”는 말을 했다. 성한 곳 하나 없이 삶의 고단함이 그대로 묻어나 있는 부모님의 발이 떠오르며 전씨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 가죽 재단 작업 ⓒ투데이신문

패턴 작업을 다 마치고 나면 재단 작업을 시작한다. 전씨는 손님이 원하는 디자인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색상과 재질에 맞는 가죽을 신중하게 골랐다. 마지막까지 가죽에 얼룩이나 흠이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그는 그제야 가죽을 재단했다. 40년이 넘는 경력답게 그의 가위질은 거침이 없었다.

   
▲ 스키 기계 ⓒ투데이신문

전씨는 재단을 마친 가죽을 들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가죽이 너무 두꺼우면 신발의 모양이 잘 안나오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스키’(가죽 깎는 기계)를 이용해 얇게 깎아주기도 한단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전씨의 뒤를 얼마나 쫓았을까 대형 스키가 구비돼있는 업체에 도착했다. 연구소에도 스키가 있긴 하지만 넓은 면적의 가죽을 깎기 위해서는 이곳을 방문한다고 했다. 스키 틈 사이로 가죽을 밀어 넣자 제법 얇아진 가죽이 흠 하나 없이 프린터에서 용지가 나오듯 올라왔다.

   
▲ 하리 작업 ⓒ투데이신문

전씨가 가죽을 깎는 동안 가게 한 편에서는 신발에 일정한 굴곡과 각도를 만들어주는 ‘하리’ 작업을 구경할 수 있었다. 평평했던 가죽을 틀 사이에 넣고 고열로 눌러주자 일정한 굴곡이 생겨 밀려 올라왔다. “우와” 감탄사를 연발하며 신기해하는 기자에게 주인 김씨는 일일이 가게 안을 돌며 각기 다른 하리틀을 설명해주는 친절함까지 보였다.

전씨와 기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연구소에는 전씨가 재단해 놓은 가죽을 연결하는 작업을 담당하는 조병엽(61)씨가 출근해 있었다. 조씨는 가죽 작업만 30년이 넘게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작업장 한쪽에 놓인 스키로 가죽과 가죽을 연결하는 이음매를 얇게 깎아주고 있었다.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연신 사진을 찍어대며 이것저것 물어보는 기자에게 조씨는 웃으면서 “옆에서 자꾸 말 거니까 하나 빼먹을 뻔했잖아”하고 호통을 쳤다. 까칠한듯하면서도 이것저것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그에게서 오전에 전씨에게서 느낀 따뜻함이 전해졌다.

오후 12시 30분, 두 사람은 늦은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전씨는 손수 하얀 쌀밥을 짓고 맑은 콩나물국을 끓여 상에 올렸다. 이와 함께 싱싱한 쌈채소에 싸먹는 오리고기 맛은 일품이었다. 식당에서 먹는 밥은 왠지 모르게 허기진 탓에 늘 직접 점심을 해 먹는다고 했다. 계속해서 밥을 권하는 전씨 덕에 배 터지게 식사를 마친 후 믹스커피 한잔을 마시며 잠시 여유를 즐겼다.

   
▲ 전태수 장인(좌) ⓒ투데이신문, 제1회 대한민국 명장 수제화 선발대회에서 명장으로 선정된 전태수 장인. 사진제공=전태수 장인

전씨는 올해로 47년째 수제화를 만들고 있다. 전씨의 아버지는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장이였다. 대장장이로는 먹고사는 일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그의 아버지는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양화점에 다니는 지인에게 아들을 부탁했다. 그렇게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서울로 상경한 전씨는 영등포 근처 신발공장에 취직해 심부름과 잡일을 돕고 다락방에서 쪽잠을 자면서 신발 만드는 기술을 익혔다. 이후 염천교를 거쳐 이곳 성수동에서 신발과 함께한 세월이 벌써 학생에서 환갑이 넘은 노인이 될 만큼 많이 흘렀다.

성수동 인근에서 신발 공장에서 디자인 총괄자로 오랫동안 몸담았던 전씨는 2년 전부터 자신의 이름을 걸고 JS슈즈디자인연구소를 오픈해 운영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제1회 대한민국 명장 수제화 선발대회에서 ‘1호 명장’이라는 영예까지 안았다. 누구와 견줘도 부족하지 않은 경력과 실력을 소유하고 명장이란 타이틀까지 얻은 전씨지만 수제화 만드는 일에 대해 고민이 없던 것은 아니다. 국내는 수제화 시장이 넓지 않은 탓에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사실상 벌어들인 수익은 없다고 했다. 아무래도 먹고 살 걱정을 안 할 수 없기 때문에 올해 초까지만 해도 연구소를 접어야 하나 깊은 고민에 빠졌던 그는 그래도 수제화 만드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일념 하나로 버티고 있다고 했다. 조심스럽게 수제화의 가격을 묻자 보통은 20만원대라고 했다. 전씨는 가격만 놓고 본다면 비싸다는 생각이 들지는 모르겠지만 한켤레를 만들기 위해 쏟는 여러 사람들의 열정과 정성을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손사래를 쳤다. 수제화를 향한 그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 가죽 작업하는 조병엽씨 ⓒ투데이신문

오후가 되자 조씨는 본격적인 가죽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오전에 스키로 깎아낸 가죽 테두리에 제화풀을 발랐다. 그가 제화풀을 칠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본인은 잘 모르겠다며 냄새가 심하냐고 물은 조씨는 제화풀은 그나마 냄새가 강하지 않은 편이라며 깔창을 붙이는 본드는 더 독하다고 했다. 손에 묻은 제화풀이 개의치 않은 듯 슥슥 문질러 닦아버리는 조씨의 모습에 건강 상태가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조씨는 제화풀을 바른 가죽 위에 하얀 끈을 둘러 붙였다. 하얀 끈의 정체에 대해 궁금한 눈빛을 보내는 기자에게 조씨는 아무 말없이 끈을 잘라 건네더니 손으로 당겨서 끊으면 신발 한켤레는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들고 있던 카메라까지 잠시 내려두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양손으로 줄을 당겼다. 하지만 끊어지기는 고사하고 손만 벌겋게 달아올랐다. “안끊어지는거 알고 일부러 그러신 거죠”라는 원망 섞인 기자의 말에 조씨는 “테이프라고 부르는데 목실로 만들어 졌다”며 “이걸 붙이지 않으면 아무리 튼튼한 가죽이라 할지라도 신발모양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금방 터져버린다”는 설명으로 답을 대신했다. 재봉틀로 자리를 옮긴 조씨는 가죽 색에 맞춰 실색을 고른 후 ‘드르륵, 드르륵’ 소리와 함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죽들을 연결했다. 조각나있던 가죽들을 연결하자 제법 신발의 모습을 갖췄다.

   
▲ ⓒ투데이신문

두 장인의 열정이 불타는 소리만 들리던 작업실의 정적을 깬 이가 나타났다. 전씨의 제자인 미르(22)씨였다.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이면 미르씨처럼 수제화 만드는 노하우를 전수받기 위해 연구소를 찾는 제자들이 많다. 신발을 판매하는 업주부터 평범한 직장인, 패션디자인과 학생까지 제자들의 직업과 나이도 천차만별이다. 그렇게 수년간 전씨의 울타리를 거쳐 간 제자들만 해도 수십명에 달한다. 이날 기자가 취재를 하는데도 많은 제자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연구소를 드나드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나중에 신발 브랜드 CEO가 되는 것이 꿈이라는 미르씨는 작업실 한편에서 패턴을 뜨고 가죽 작업하는 것을 배우고 있었다. 그녀는 전씨가 가게 문을 닫고 집에 갈 때까지 함께한다고 했다. 한창 놀고 싶을 나이에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쉬울 법도 하건만 미르씨는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조씨가 “신발 만드는 건 만드는 개수에 따라 수입이 달라지는 도급제이기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하루가 너무나 짧다”고 거들었다.

   
▲ 제자가 전태수 장인에게 선물한 구두(상), 제자가 쓴 손편지(하) ⓒ투데이신문

전씨는 제자들을 볼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면서 먼지가 뽀얗게 쌓인 상자 하나를 꺼내 펼쳐 보였다. 그 안에는 삐뚤빼뚤 서툰 솜씨로 만든 신발 한켤레가 들어있었다. 그는 “제자가 만들어준 신발인데 실력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며 “아까워서 아직 한 번도 못신었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는 행복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전씨는 연구소를 찾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2012년부터 구청에서 수강생들을 모아 수제화 교육을 전담해오고 있다. 또 가끔씩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체험 교육을 하기도 한다. 그는 그때 만났던 학생들이 써준 손편지를 버리지 않고 앨범에 끼워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살아있는 진정한 스승이 있다면 전씨가 아닐까 생각했다.

   
▲ ⓒ투데이신문

오후 6시, 다시 책상에 자리를 잡고 작업을 시작하려는 전씨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카메라에 담으며 ‘언제까지 수제화 만드는 일을 계속할 것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전씨는 “판매 목적이 아닌 오롯이 작품으로 만든 훌륭한 수제화들을 모아 놓는 구두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며 “그 소원을 이룰 때까지는 아마 계속해서 일을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성수동에서의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일찍이 셔터문을 내린 다른 수제화 가게들 사이로 밝게 빛나는 JS슈즈디자인연구소의 간판에 눈이 부셨다. 그리고 문득 전씨의 소원이 이뤄질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