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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112-12. 이곳에 25년째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헌책방이 있다.

신촌에서 홍대로 넘어가는 길목, 현관 입구에서부터 수북이 쌓여있는 헌책들과 LP판들이 가던 길을 멈추게 하는 이곳은 ‘공씨책방’이다.

책을 무엇보다 아끼고 사랑하던 공진석씨가 1972년 서울 회기동에서 시작한 공씨책방은 1990년 세상을 떠난 공씨를 대신해 1991년부터 처제 최성장 씨와 조카 장화민 대표가 신촌에서 25년째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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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대형문고들의 매서운 압박에도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온 이곳 공씨책방이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이번 달 신촌을 떠나게 됐다.

이에 기자는 오랜 시간 신촌의 한 길목을 지키던 공씨책방의 마지막 모습을 담고 싶어 조금은 조급한 마음으로 지난 13일 공씨책방을 찾았다.

신촌역 1번 출구를 빠져나와 홍대방향으로 걷다보면 오른쪽 편에는 지난 2012년 신촌역에 새로이 들어온 대형 중고서적 ‘알라딘’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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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의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는 신촌역 근처는 그야말로 젊은이들의 ‘핫 플레이스’로 불리기에 충분하다. 수많은 프랜차이즈 매장들을 지나며 ‘이 젊은 거리에서 과연 수십년 역사가 서린 헌책방을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공씨책방’이라 써진 큼지막한 간판이 눈에 띈다.

책방에 들어서는 입구부터 돌탑처럼 쌓여진 헌책들을 행여나 무너뜨리지는 않을까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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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공간에 빼곡히 세워져있는 책장들과 그 사이 빈틈없이 쌓여 있는 헌책들 사이를 지나서 향한 책방 2층에는 공간 전체가 LP판과 카세트테이프로 가득했다. 그 시대를 살지 않아 실제로 레코드판조차 본 기억이 없는 기자에게 이 공간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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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 동안 추억과 역사가 담겨 있는 물건들을 찬찬히 살펴보다 다시 내려간 1층에서 공씨책방의 현 주인 장화민(60)씨를 만날 수 있었다.

책방을 시작한 공씨가 세상을 떠난 1990년부터 책방을 물려받아 운영해오고 있는 장씨의 얼굴에는 얘기를 나누기 전부터 걱정과 근심이 그대로 드러났다.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보금자리를 잃게 된 슬픔에 몇 달째 마음고생을 하다가 최근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신세까지 진 장씨는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시련인데 도움 받을 곳 하나 없어 너무나 답답하고 힘들다”며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장씨는 지난 8월, 아무런 예고없이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다. 이에 건물주와 대화하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지만 “장사를 계속하려면 지금보다 두 배의 임대료를 내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 건물주를 직접 만날 수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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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씨책방은 지난 2013년 서울시가 지정한 ‘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장씨는 공씨책방의 가치를 인정해준 서울특별시 미래유산에 도움을 요청 했지만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서울시 미래유산은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은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 중 미래세대에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을 앞으로 보존하고 지켜나가겠다는 서울시의 약속이다.

하지만 서울시 미래유산에서 도움을 요청했던 공씨책방에 돌아온 대답은 “관련 사항에 대해서는 지원할 수 있는 제도가 없기 때문에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말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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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을 찾은 단골손님 이혜정(33·여)씨는 책방 이전 소식에 국가의 역할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했다.

이씨는 “사실 이 같은 문제는 개인이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폭력적인 물가에 쫓겨나는 상인들을 위해 국가가 나서줘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서울시내 구도심이 번성하며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은 2000년대 이후부터 계속되고 있다.

특히 공씨책방이 자리한 이곳 홍대근처는 젊은이들과 관광객들에게 집중 소비되면서 거대 프랜차이즈의 각축장이 된 지 오래다.

감당할 수 없는 임대료에 쫓겨나는 상인들이 많아지며 맘 편히 장사하고픈 상인 모임(이하 맘상모)이라는 단체까지 결성되고 지속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상거건물 임대차보호법이 통째로 않는 이상 이 같은 상황은 계속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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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씨책방 역시 이번 달 안으로 성수동 지하상가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그 자리에는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업종이 들어올 것이다. 수십년의 역사가 서린 헌책방이 없어지고 이미 신촌역을 가득 매우고 있는 유명 프랜차이즈가 이곳에 들어선다면 이는 누구에게 반가운 처사일까.

자본주의의 욕망이 휩쓸고 간 뒤 이 자리에는 과연 무엇이 남을까. 책방을 나서는 길, 들어설 때 큼직하게 보였던 ‘공씨책방’ 간판이 더 이상 커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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