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방문 요양보호사의 하루

   
 

할머니 업고 계단 내려오다 다치기도  
대소변 받는 일부터 청소, 빨래까지 
메르스 확산 때도 할머니 병수발해
노동 강도에 비해선 ‘대가’ 낮아

본지는 지난 1월 7일 어르신에게 손과 발이 되는 든든한 존재, 요양보호사의 노동을 들여다봤다. <땀으로 쓴 노동일기>를 통해 성실하게 일하는 가정방문 요양보호사의 하루를 보여드리고자 한다.

※ 해당 기사는 포털사이트 다음의 콘텐츠 크라우드 펀딩플랫폼 ‘스토리펀딩’에 실렸다.

【투데이신문 이주희 기자】아침이 되면 요양보호사 김명자(가명·61)씨의 발걸음은 빨라진다. 김씨는 서울 제기동역에서부터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박영순(가명·88) 할머니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의 걷는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3주 전, 병원을 가기 위해 박 할머니를 업고 계단을 내려오다가 넘어져 다친 것이다. 당시 계단 모서리에 무릎을 찧었고 할머니를 다치지 않게 하려다 허리까지 삐끗했다. 다친 이후로는 할머니를 업고 계단을 내려갈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그래서 외출할 일이 생기면 사람의 손길이 한없이 그리워진다.

김씨는 2008년 가을부터 시작해 올해로 9년째 가정방문 요양보호사 일을 하고 있다. 요양보호사는 요양원과 같은 시설 근무와 가정방문인 재가 근무로 나뉜다. 그는 거동이 불편하고 치매가 있는 박 할머니를 10개월째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있다.

칼바람 맞으며 걷기를 5분, 드디어 할머니 댁에 도착했다. 삐걱거리는 철문을 열고 들어선 김씨는 계단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채 “여기서 넘어졌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절뚝거리며 계단을 올라 집 안으로 들어섰고 스마트폰을 통해 출근 도장을 찍었다.

   
 

부엌에서 아침밥을 짓고 있던 할머니의 딸 정미숙(가명·53)씨가 살갑게 김씨를 맞이했다. 김씨는 냉기가 도는 부엌 한 쪽에 점퍼를 벗고 착용하던 허리보호대를 풀었다. 그리고 누워있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엎드린 채로 말을 걸었다.

“할머니~ 추운데 왜 양말 안 신었어요?”

머리맡에 놓인 분홍색 양말을 보며 김씨가 말했다. 그는 할머니의 손과 다리, 팔을 쉴 새 없이 주무르며 정씨와 함께 할머니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정씨는 근처에 살고 있는데 저녁이 되면 이곳에 와서 잠을 잔다. 예전에 사고로 척추를 다친 정씨는 장애 2등급을 판정받아 몸이 불편해 어머니를 돌보기가 어렵다. 요양보호사 김씨의 도움이 절실한 이유다.

김씨는 할머니의 몸을 돌려 엉덩이에 난 욕창에 연고를 발랐다. 할머니는 욕창이 심해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 게다가 당뇨 합병증이 무릎으로 찾아와 걷지 못한다. ‘죽기 전에 한번 걸어보는 것’이 소원이지만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무릎 수술을 하려고 했는데 위험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류머티스성 관절염도 있어 손가락이 자꾸만 오그라들고 통증이 극심하다. 의사는 할머니가 과거 식당에서 칼질을 많이 해 손가락에 관절염이 왔다고 했다. 몸에 수분이 빠지고 기름기가 없어 온몸에 가려움증도 호소하고 있다. 치매 증상으로 인해 이상한 소리를 할 때도 있고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일어나지도, 화장실도 가지 못한다. 얼마 전에는 안면마비가 와서 음식을 씹고 삼키기 힘든 상황이다. 6남매를 키우느라 몸이 닳아버린 할머니는 그렇게 아이가 되었다.

   
 

“가슴에 붙이는 패치 못 봤어?”
“몰라.”
“항상 여기 두는데… 할머니가 버렸구먼.”

김씨가 서랍에 넣어둔 피부 패치를 찾고 있는데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치매 증상이 있는 할머니는 물어도 모른다는 대답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히 4개가 있었는데, 할머니가 지저분하다며 버리고는 기억을 못 하는 듯했다.

패치가 없으면 가려움증이 심해져 병원에 가야 한다. 세 사람은 작은 상에 둘러앉아 아침을 먹고 난 후 병원에 가기로 했다. 오늘 메뉴는 미역국. 할머니는 미역국에 부드러운 찹쌀밥을 말아 천천히 입에 넣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김씨의 눈은 할머니를 향하고 있었다.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입속으로 음식이 들어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밥을 몇 숟갈밖에 먹지 못 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식사를 도왔다.

밥을 다 먹고서는 빨대가 달린 물통을 가져와 물과 함께 소화제를 먹였다. 약을 먹은 할머니는 쇠기침을 하며 드러누웠고 김씨는 설거지를 했다. 이후 바닥에 깔린 담요를 걷어 밖으로 나가 이를 탈탈 털었다. 담요에 묻은 먼지는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나온 김에 휴지통에 담긴 쓰레기들을 모아 분리수거도 했다.

   
 

가정방문 요양보호사가 하는 일은 참으로 다양하다. 욕창 닦는 일을 비롯해 체위 변경, 대소변 받아내기, 목욕, 식사준비 등 어르신 병간호를 한다. 그 외에도 청소를 비롯해 빨래, 설거지, 쓰레기 버리기 등 잡다한 일을 한다. 정씨는 평소 어머니가 해오던 일이라는 이유로 김씨가 계단 청소까지 해준다며 고마워했다. 심지어 그를 생명의 은인으로까지 생각했다.

지난해 5월, 우리나라에 중동호흡기질환인 ‘메르스’의 공포가 나라를 뒤흔들 때였다. 메르스가 퍼진 지 3일이 지났을 무렵 할머니는 몸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져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메르스가 잠잠해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상황은 오히려 반대였다. 병원이 폐쇄되고 사망자가 속출하는 등 심각한 사태에 이르렀다.

자식들조차 병문안을 갈 수 없는 상황에서 20일 넘게 할머니 곁을 지킨 사람이 김씨였다. 그의 가족도 병원에서 나오라며 일을 만류했으나 흔들리지 않았다. 요양보호사로서 책임감도 있었지만, 자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할머니를 두고 나올 수 없었다. 당시에 엄청 무서웠지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아 다행이었다고 김씨는 말했다.

   
 

어느 정도 집안일을 끝내놓은 뒤 할머니에게 옷을 갈아입히며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런데 옷을 다 입힌 김씨가 계단을 보며 심호흡을 했고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김씨는 정씨와 기자의 도움을 받아 할머니를 업고 얼굴이 새빨개진 채 계단을 내려왔다.

할머니를 휠체어에 안전하게 앉힌 뒤에야 혀를 내밀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내 고개를 축 늘어뜨린 할머니에게 신발을 신겨주고 목도리로 얼굴을 감싸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후다닥 방으로 올라가 두꺼운 점퍼를 입고 나왔다. 조용하던 할머니가 처음으로 기자를 향해 입을 뗐다.

   
 

“딸도 요렇게는 못할 거여. 나 돌보느라 힘들어. 그러니 다친 허리가 안 낫지….”

할머니는 김씨가 끼워준 장갑을 만지작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눈은 아주 느리게 깜빡였고 시선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지만 고마운 마음은 선명하게 전해지는 듯했다. 급하게 준비를 하고 나온 김씨는 휠체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두 사람은 조잘조잘 수다를 떨며 웃었고, 가다가 높은 턱을 만나면 휠체어를 잡으며 조심스레 내려갔다.

   
 

오전 10시, 이들은 자주 가는 동네 한의원에 들어섰다. 간호사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며 문을 잡아주었다. 휠체어에 탄 할머니를 물리치료실 침대로 옮기는 것은 온전히 김씨의 몫이다. 침대에 눕힌 다음에는 점퍼와 목도리, 장갑을 벗기고 편한 자세로 눕혀야 한다. 얼굴에 땀이 범벅인 김씨는 옷가지를 안고 30분 동안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김씨는 요양보호사를 하면서 잊을 수 없는 어르신이 있다. 바로 이 일을 시작하고 처음 만난 90대 노부부다. 노부부는 아침이 되면 일어나자마자 요양보호사가 오길 애타게 기다렸다. 치매에 걸린 두 어르신은 모두 소변 주머니를 차고 있었고 거동도 불편했다. 그들을 돌본 지 2년 정도 지났을 때 할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할아버지는 매일 아내가 눕던 침대를 보며 소주를 반병씩 먹었다. 그때 김씨에게도 우울증이 찾아왔다. 고된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론 두 어르신을 끝까지 돌봐드린 것에 보람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지난해 사지를 움직일 수 없는 70대 어르신을 돌봤던 시절이다. 더운 여름, 덩치가 큰 할머니 몸에 난 욕창을 닦던 일이 힘들었다. 소변 주머니를 교체할 때마다 풍기는 냄새를 견뎌야 했는데 가족들은 바람을 맞으면 할머니의 입이 돌아간다며 창문을 열지 못하게 했다. 구린내가 진동하는 밀폐된 공간에서 4시간 동안 냄새를 참기란 쉽지 않았다. 어지러움을 호소할 정도였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는 냄새가 바람에 실려 가길 바라면서 먼 거리를 돌아갔다.

   
 

김씨는 요양보호사 일을 남편이나 자녀에게 세세히 말하지 않는다. 엄마가 고되게 일하는 것을 자식들이 알면 혹시 상처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서다. 가족들은 그가 어르신과 대화하고 몸을 주물러주고 오는 것으로만 안다.

대화를 하다 보니 물리치료가 끝이 났다. 병원에 오면 바삐 서둘러야 하므로 김씨는 신속히 다른 병원으로 이동했다. 찬바람이 불었지만 김씨는 자신의 옷을 여미지 않은 채 할머니의 입을 목도리로 막아주기에 바빴다.

S병원 진찰실에 들어서면 혈압을 재는데 이때도 김씨의 도움이 필요하다. 담당의사가 할머니의 몸 상태가 좋아졌다고 하니 김씨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는 의사가 하는 말을 경청하기도 하고 질문을 건네기도 했다.

   
 

두 사람은 병원을 나와 약국으로 향했다. 약국을 고를 때는 휠체어가 잘 들어갈 수 있는 계단 없는 곳을 택한다. 김씨는 약사가 준 쌍화탕을 할머니가 잘 마실 수 있도록 도왔다.

추운 골목길을 지나 두 사람은 집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따뜻한 바닥에 손을 갖다댔다. 아무리 누르고 비벼도 오므라든 손가락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속상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만지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애기들 가르치고 먹고 살아야 했으니깨, 그래서 다리를 못 쓰게 됐나…”

할머니는 눈을 감은 채 떨리는 입술로 이렇게 말했다. 젊은 시절, 할머니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3년 동안 가뭄이 들어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결국 40세에 서울로 올라와 떡과 과일 장사를 했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기에 남편과 악착같이 일했다. 떡을 이고지고 다니기 너무 무거워 떡 장사를 10년 정도 하다가 관두고 한식당을 차렸다. 식당을 꾸려가다가 남편은 67세에 간경화로 허망하게 세상을 떴다. 첫 손녀가 태어나는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은 것.

   
 

세월의 모진 풍파를 잘 견뎌왔지만 요즘에는 버틸 힘이 부족해져 할머니는 속상하다. 지난 여름에는 김씨와 같이 한강 둔치나 경동시장을 놀러 가기도 했는데 지금은 밖에 나가는 일이 힘겹고 버겁기만 하다. 그래도 옆에서 자신을 성심성의껏 돌봐주고 챙겨주는 김씨가 있어 힘이 난다.

“어르신이 말을 못해서 그렇지. 나한테 얼마나 미안하겠어요.”

이런 할머니의 마음을 잘 알기에 김씨는 일에 대해 크게 불평을 하지 않았다. 다만 노동 강도에 비해 대가가 적은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요양보호사를 파견하는 노인복지센터마다 차이는 있지만 그가 받는 시급은 7625원. 박 할머니집에서 매일 4시간씩 일하고 한 달에 60만 원 정도를 번다. 수급자는 가정방문 요양서비스를 이용한 금액 내에서 15%가량을 부담한다.

   
 

때론 요양보호사가 파출부나 식모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힘든 만큼 보람이 있다. 일을 마치고 집에 가기 전, 할머니가 평온한 미소를 지으면 그것만큼 보람되고 기쁜 건 없다. 김씨는 약국에서 사 온 약을 정리하고 점심상을 차렸다. 마지막으로 방에 누워 있는 할머니에게 TV를 틀어주고 인사를 했다. 오늘은 할머니가 아픈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낮 12시 40분, 김씨는 또 다른 어르신을 보듬기 위해 종종걸음을 쳤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 못 볼 사람처럼 가족을 대하라”… 그의 뒷모습을 보니 할머니집 냉장고 문에 붙은 정호승의 시 한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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