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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은 누군가에게 쓰레기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밥이고 생명줄이다. 이번 호에는 쓰레기 더미에서 보물을 찾는 노동자의 하루를 담았다. 지난달 27일, 본지는 경기도 구리의 한 고물상을 다녀왔다.

비와 함께 했던, 일곱 번째 <땀으로 쓴 노동일기>를 지금 시작한다. 아래 기사는 포털사이트 다음의 콘텐츠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스토리펀딩’에도 게재됐다.

【투데이신문 이주희 기자】버림받은 물건들의 공간에서 여러 손이 움직인다. 유리병을 옮기고, 고철을 떼어내고, 쏟아지는 폐지와 헌 옷의 무게를 재고…. 그들은 거세지는 빗줄기를 좀체 신경 쓰지 않는다. 오전 7시 40분, 구리시 수택동에 있는 한 고물상의 아침 풍경이다.

일을 하다가 사무실로 들어온 고물상 사장은 차가운 물에서 쌀을 씻어냈다. 이내 전기밥솥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는 아침밥을 안친 뒤 후다닥 이곳을 빠져나갔다. 고물상 사람들은 따뜻한 컨테이너 사무실이 아닌 주로 밖에서 일을 한다.

같은 시각, 기자는 고물상 사무실에 앉아 김성래(75)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잠시 후 김씨 할아버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집에서 나오는 길에 파지를 줍느라 조금 늦었다고 그는 말했다. 담배 한 대를 피우고 가자던 할아버지는 하늘을 보며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는다. 새벽부터 내린 비는 야속하게도 멈출 기미가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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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이라도 사 먹으려면 나가야지. 우리 같은 사람한테는 여유가 없어요.”

결국 할아버지는 고물상 사장에게 우비를 빌려 입었다. 그리고 한 손에 우산을 쥐고 자신을 닮은 오래된 수레를 끌며 밖으로 향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인생, 굶기 싫으면 일해야 한다고 그는 읊조렸다.

할아버지는 보통 아침 7~8시부터 초저녁까지 고물을 줍는다. 하루 4번 정도 고물상을 오가며 구리시 수택동 일대를 돌고 돈다. 파지를 비롯해 전깃줄, 깡통, 술병, 페트병, 옷 등 돈이 될 만한 건 다 줍는다. 아침은 주로 라면으로 대신하고 점심은 건너뛴다.

할아버지는 세탁소, 고깃집, 노래방, 술집이 밀집해있는 골목을 유유히 걸었다. 길 위에는 움푹 팬 웅덩이마다 빗물이 고여있었다. 그의 발이 웅덩이 속 구정물에 담겼다 빠지기를 반복했다. 작은 물웅덩이는 피하지만 크고 깊은 웅덩이는 그냥 밟고 지나가야 한다. 수레 때문이다. 고물상 사장이 만들어준 수레는 무게만 73kg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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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수레에 빗물만 담기는 시간이 길어지던 중 처음으로 뻘건 소스가 묻어있는 피자 박스가 실렸다. 고물은 가만히 앉아 그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누구보다 빨리 고물을 발견해야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된다. 몇 걸음 걸었을까. 한 모텔 앞에 놓인 검정 비닐봉지 안에 일회용 도시락통, 페트병, 나무젓가락이 뒤엉켜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안에서 페트병을 꺼내 자신의 노란 포대에 담은 뒤 다시 봉했다. 봉지를 뒤진 후에 주변 정리도 빼놓지 않았다.

잠시 후 할아버지는 한 고깃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깃집 구석에 있는 창고 문을 열어 막걸리 페트병을 주워담았다. 비에 젖은 신문과 비린내 나는 멸치박스도 수레에 몸을 실었다. 그는 테이프가 붙은 종이박스를 손으로 뜯어내 펼친 다음 평평하게 쌓았다.

할아버지의 삶은 얼굴에 핀 주름처럼 굴곡져 있다. 아내는 없고 자식과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은 월세방에서 아들과 함께 살았는데 뜻이 안 맞아 헤어졌다. 지금은 고물상 근처 월세방에 홀몸을 누이고 있다. 할아버지는 15년 전에 직장암 수술을 받았는데 이후 건강이 나빠져 심장도 좋지 않고 당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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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번 나오는 노령 연금 21만 원이 할아버지의 유일한 수입원이다. 한 달에 방세만 25만 원. 여기에 관리비, 공과금, 병원비가 들어가므로 매달 최소 40만 원은 벌어야 한다. 하지만 온종일 일해도 담배 한 갑 값도 못 벌 때가 많다. 최근 동사무소에 생활보호대상자 신청했는데, 심사결과가 나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할아버지는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인 모텔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주차된 차를 헤치며 구석에 도착하니 건설 폐기물이 잔뜩 놓여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벽지를 한 무더기 들고 나왔다. 리모델링하는 가게나 이사 가는 집을 만나기라도 하면 이런 날은 ‘수지맞는 날’이다.

할아버지는 67세 때 경비 일을 지원했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뒤 7년간 고물을 주워왔다. 이 일에 대해 그는 “죽지 못해 하는 것이지요”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힘들지 않냐는 물음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나이 먹어서 몸 아픈 곳이 많아요. 그래도 길거리에 앉아 동냥할 수는 없는 일 아녀요?” 그리고 반찬거리를 5천 원어치 사봤자 먹을 게 없다며 비싼 물가를 한탄했다. 갈수록 떨어지는 고물값에 대한 원망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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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30분, 동네 한 바퀴를 돈 할아버지가 고물이 가득 찬 수레를 끌고 고물상에 도착했다. 파지(kg당 90원)는 87kg, 양은(kg당 950원)은 0.5kg, 이렇게 해서 8310원을 벌었다. “형, 오늘 운이 좋구먼!” 고물상 사장이 지폐와 동전을 할아버지에게 건네며 말했다. 주변에서 무게를 재던 고물상 식구들도 칭찬을 쏟아냈다.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자신이 가져온 고물을 한쪽에 쌓았다. 이어 사무실에 앉아 따뜻한 믹스 커피를 마시면서 젖은 몸을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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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그치고 해가 쨍쨍 내리쬐었지만 바람은 기세등등하다. 그래도 노동은 계속된다. 다시 고물상에서 나와 5분가량 걸으니 재활용센터 사장이 고철로 된 선반을 가져가라고 손짓했다. 할아버지는 미소를 머금은 채 재빠르게 선반 8개를 수레에 실었다.

이번에는 구리전통시장 골목으로 향했다. 좌판과 주차된 차로 즐비한 골목에 들어서자 수레는 거북이걸음이다. 행여 좁은 길에 주차된 차를 긁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중 한 식당 앞에 놓인 철로 된 고추장통을 발견했다. 이윽고 통을 집어 들고 고추장과 빗물이 섞인 물을 쏟아낸 뒤 이를 수레에 담았다. 지나가던 아주머니 두 명은 본인들이 누군가로부터 받은 전단을 수레 위로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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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걸으니 주택 앞에 누군가가 버린 옷 무더기가 보였다. 계절이 바뀔 무렵에는 옷이 많이 나오는데 요즘엔 경기가 나빠 예전보다 옷이 안 나온다고 할아버지는 푸념했다. 추워지는 날씨에 난방비 걱정이 크다. 그는 대화 끄트머리마다 “겨울이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오늘은 춥고 비가 와서 고물 줍는 노인들이 별로 안 나왔네요.” 할아버지는 이날의 궂은 날씨를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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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30분쯤, 할아버지는 묵직한 수레를 끌고 고물상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도 발걸음은 가볍다. 이게 다 돈이 아닌가. 옷(kg당 450원)은 3kg, 파지 43kg 등으로 이번에는 5220원을 벌었다. 한편 집게차가 고물상 귀퉁이에 있는 파지 더미를 화물칸에 싣고 있었다. 이에 할아버지는 주워온 고물을 한쪽에 부려놓은 후 파지 무게를 재거나 계산을 하는 등 모자란 일손을 거들었다. 일을 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 소원이 하나 있어요. 산에 들어가서 조용히 사는 거요. 근데 산도 돈이 있어야 들어가지? 허허”

그의 웃음이 왠지 씁쓸하게 느껴졌다. 삶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말이리라. 고물상 사무실에서 1시간 정도 쉰 할아버지는 수레와 함께 다시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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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한 할머니가 운영하는 거리 과일 노점으로 향했다. 탐스러운 과일 대신 찌그러진 과일 박스를 얻기 위해서다. 박스 양이 많은 날이면 할아버지는 노점상에게 박스들을 1천 원에 사 온다고 한다. 이 박스들을 고물상에 팔면 몇백 원이 남으므로 빈 손수레를 끌고 다니는 것보다 낫다는 게 그의 셈법이다. 하지만 오늘은 허탕이다. 과일 박스 몇 개만이 수레에 담겼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는 오전에 방문했던 리모델링 중인 모텔에 가서 벽지를 두 덩어리 더 챙겼는데 그 덕에 빈약한 수레가 금방 묵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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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힘들어서 못다니겄다.”

허리 통증을 호소하던 할아버지가 한 식당 앞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비 오는 아침부터 무리하게 일한 탓이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자신의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일어나 고물상으로 향했다.

그는 야트막한 내리막길인데도 몸을 힘껏 뒤로 젖히며 느린 속도로 걸었다. 오후 3시, 고물상에 도착해 무게를 재보니 파지 57kg으로 총 5130원이 손에 쥐어졌다. 할아버지는 벽지와 종이들을 파지가 모인 곳에 밀어 넣었다. 이날 고물을 팔아 번 돈은 모두 1만8660원. 지폐와 동전이 두둑이 든 주머니가 노동의 끝을 알렸다. “오늘 땡 잡은 날이네, 진짜 운이 좋구먼!” 까만 장갑을 낀 할아버지가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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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상 사장의 독백… “눈물 나도록 비참하다”

나는 고물상 사장이다. 이름은 정춘식(남‧61‧가명). 현재 경기도 구리에 있는 작은 고물상을 1년 넘게 운영하고 있다.

오늘은 어떤 기자가 고물상의 문을 두드렸다. 취재하러 왔다는 그를 앞에 두고 “여기 취재하지 마세요! 진짜 너무 비참해요”라고 소리쳤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이 말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

기자는 옛날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 나에게 자꾸 말을 걸었다. 어쨌든 물어보길래 이야기를 하려는데…. 목구멍으로 울컥한 것이 올라와 급하게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눈물을 닦고 나와서는 태연한 척했다. 물음에 답할 때마다 나는 “비참하다”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 전 한 종교 방송에서 촬영을 나왔을 때도 울음이 터져 인터뷰를 하지 못했다.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자꾸 목이 메고 눈물이 난다.

사실 나도 한때 잘 나갔다. 젊은 시절, 중고 자동차 시장에서 30년 넘게 근무하다가 아파트 계약 채권매입 관련 일을 했다. 이런 말하기 뭣하지만 5~6년 전만 해도 돈을 무지하게 많이 벌었다. 그러다가 여러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 상처를 입었다. 이런 이유로 방황을 하다가 고향 후배의 권유로 이 업계에 발을 디디게 됐다.

노후를 대비하려고 들어둔 연금보험을 해약해 그 돈으로 고물상을 시작했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고물상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시끄럽다, 먼지가 난다는 등의 민원을 넣거나 항의를 해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항의가 없어 다행인데 당시 이런 부분에 대응하기가 힘들었다.

요즘은 고물값, 특히 고철값이 뚝뚝 떨어지고 있어 걱정이다. 건설붐이 일어나야 고철값이 오르는데, 건설붐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고물상이 세금을 안 낸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1년에 대략 몇백만 원의 세금이 나간다. 그뿐인가. 땅세, 인건비, 전기세, 보안시스템 등 이런 돈을 내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다. 열흘에 한번꼴로 들어가는 화물차 기름값, 하루에 여섯 병씩 먹는 막걸리값만 남는다. 오늘도 고철 업체에서 문자가 왔다. 문자는 8월부터 계속 “고철값을 인하하겠다”는 내용뿐이다.

그나마 내가 돈을 잘 벌 때 자식들을 잘 키워놓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들과 딸들은 번듯한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은 가족과 멀어져 연락을 잘 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혼자서 고등학생 여자아이를 키우고 있다. 장애가 있는 그 아이를 아주 어릴 때 데려왔는데 내겐 딸 같은 존재다. 아이가 얼마 전부터 계속 10만 원짜리 패딩 점퍼를 사달라고 조르고 있다. 조금 더 기다리면 패딩 가격이 내려갈까 해서 버티는 중이다. 그 나이 때 갖고 싶은 게 많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청국장에 꽁보리밥을 말아놨는데요. 너무 바빠서 못 먹고 있다구요!” 기자에게 내 점심 밥그릇을 보여주며 하소연했다. 가끔 한 교회 목사님이 나에게 밥을 갖다 주는데, 이마저도 시간이 없어 잘 먹지 못한다. 밥 대신 막걸리로 배를 채우는 게 일상이다. 고물상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나의 몸무게는 80kg에 달했는데 현재는 67kg 정도다. 먹다 남은 밥은 버리지 않고 집에 가져가 개들에게 준다. 남은 밥을 버리기가 아깝고 요즘 사룟값도 비싸니까!

고물상에 있으면 안타까운 사연을 많이 접하게 된다. 올여름, 93세 할머니가 굶어서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얼마 전에 들었다. 할머니는 고물상 사무실에 올 때마다 믹스 커피를 주머니에 챙겨가곤 했다. 자식도 있고 며느리도 있는데 끼니를 거르는 게 안타까워 할머니가 커피를 한 주먹씩 훔쳐가도 모른 척했다. 그런데 돌아가셨다니 마음이 아프다.

고물상에는 노인, 생활보호 대상자, 노숙자, 장애인에 이르기까지 불쌍한 사람이 많이 온다. 늘 배고픔을 호소하는 그들은 고물상 사무실 테이블 위에 음식이 있으면 바로 먹어버린다. 고물을 주워 하루에 1천원도 못 버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안쓰러워 유모차를 구해주거나 수레를 만들어주곤 한다.

아침 출근길, 나는 종종 유모차에 고물을 양껏 실은 할머니들을 목도한다. 그들을 보면 나의 어머니가 떠올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우리 어머니는 파지를 줍다가 자동차에 치여 돌아가셨다. 이것이 내가 할머니들의 고물을 받고 정직하게 돈을 건네는 까닭이다. 에구, 환갑이 넘었는데 아직도 주책없게 눈에서 물이 나온다.

※ 위 기사는 고물상 사장의 시점에서 작성한 것으로 ‘독백 형식’을 취했다. 취재원의 발언과 당시 상황을 토대로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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